"미친 지젤 연기할 땐 나도 어려워 미치겠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1.06.02 03:08

발레리나 서희, 세계 3대 발레단 美 ABT서 오늘 '지젤' 데뷔
줄리 켄트 등 스타급 발레리나와 배역 번갈아 맡아… '발레리나의 로망' 5년 만에 꿰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발레리나 서희(25)가 1일(한국시각 2일) 지젤로 데뷔한다. 지난 27일 개막해 2일까지 공연하는 낭만 발레 '지젤'에서 그는 줄리 켄트, 팔로마 헤레라 같은 스타들과 지젤 역을 나눠 맡는다. 무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이다.

'지젤'은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과 함께 세계 3대 발레단에 꼽히는 ABT가 해마다 올리는 간판 레퍼토리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서희는 31일 국제전화에서 "지젤은 여자 무용수의 로망"이라면서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참 건조한 어조였다.

"무덤덤하죠? 입 밖으로 뭔가 꺼낼수록 내 안에 고여야 할 게 없어지는 것 같아 억누르는 습관이 있어요. 몇달 전 탈의실에서 (수석 무용수) 질리안 머피가 '너 지젤 한다'고 해 캐스팅을 알았는데, 그때도 내 반응은 '아, 그렇구나'였지요."

이 한국인 발레리나의 성공 스토리는 궤적이 탄탄하다. 서희는 2003년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거쳐 ABT에 둥지를 틀었다. 출발은 맨 아래 등급인 코르 드 발레(군무진)였다. 그는 "'발레단의 등뼈'라 불리는 코르 드 발레에서 보낸 4년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다. 무용 월간지 '타임아웃'은 이미 2008년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발레리나'로 서희를 지목했다. '호두까기 인형'으로는 "이 발레의 진짜 이야기는 눈의 여왕을 맡은 서희"(워싱턴 포스트)라는 평까지 받았다.

ABT에서 서희는 '고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코르 드 발레로는 이례적으로 2009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맡아 주목받았고 지난해에는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이번엔 지젤이다. 주역은 신체조건과 예술성, 테크닉은 물론 그 작품과의 '궁합'까지 감안해 결정된다. 이 발레리나는 "이름 없는 배역으로 '지젤'에 참여할 땐 '지루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젤로 춤추니 진가를 알게 됐다"면서 웃었다.

'지젤'은 짝사랑과 후회, 용서로 이어지는 낭만 발레의 대표작이다. 시골 처녀 지젤이 약혼녀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진다. 지젤이 사랑하다 배신당해 죽음에 이르는 1막과 윌리(결혼식 전에 죽은 처녀 유령)로 알브레히트와 재회하는 2막의 대비가 강렬하다. '발레의 햄릿'으로도 불린다.

‘지젤’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서희는“위대한 무용수와 날 비교하면서 괴로워하는 일은 이제 안 한다”고 했다. 사진은‘로미오와 줄리엣’의 서희(줄리엣).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제공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신경쓰이지만 지젤이 미치는 대목이 특히 어려워요. 머리에 꽃 꽂고 미치는 게 아니라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거든요. 그 무질서 속에서 아름다운 라인을 찾아야 합니다."

서희가 최고로 꼽은 장면은 2막 초반, 지젤이 무덤에서 나와 윌리로 변하는 대목이다. 그는 "사람(1막)과 유령(2막)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라면서 "30초밖에 안 되지만 귀신처럼 역동적으로 날아다닐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1841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이 낭만 발레가 지젤을 맡은 무용수에게도 낭만적일까. "흐흐흐. 그래야 하는데 숨차고 땀나고, 가까이서 보면 전혀 안 낭만적이에요."

지난해 11월 오른쪽 발목을 다쳐 5개월 넘게 무대 밖에 있었던 이 발레리나는 "걷는 것부터 새로 익힌 기분"이라고 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먼의 춤을 대신 춘 무용수 사라 레인이 그의 동료(솔리스트)다. "ABT에서 살아남으려면 개성이 강한 춤을 출 수 있게 투쟁해야 해요. 사라는 작은 키(155㎝)를 노력으로 극복한 좋은 무용수입니다."

168㎝의 서희는 라인(선)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배역에 어울린다는 평이다. 그에게도 결핍이 있었다. 가장 열망하는 작품은 '백조의 호수'. "흑조처럼 강한 카리스마와 테크닉이 필요한 배역에 끌려요. 사람들은 갖지 않은 걸 더 원하는 법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