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5.18 11:30
'눈물 없이 어찌 광주를 이야기할 수 있으랴'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은 역시 위대한가 보다. 눈물과 투쟁, 정의와 진실의 영역에 머물러있던 5.18을 웃음과 과장, 해학으로 포장한 연극을 만날 수 있게 됐으니.
'푸르른 날에'(연출 고선웅)의 눈에 띄는 특징은 독특한 연출이다. 사실 5.18을 둘러싼 화두들은 매우 낯익다. 상처와 치유, 용서와 화해, 진실 규명과 정의의 메시지는 그동안 무수한 픽션과 논픽션을 통해서 익히 봐온 것들이다. 2011년의 시점에서 그날의 광주는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광주를 보여줄 것인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고선웅 연출의 선택은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었다. 묵직한 화두들을 '쿨(Cool)'하게 포장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관객들은 '어라?'하는 당혹감이 들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80년 5월의 자신을 보며 과장된 목소리와 코믹한 동작으로 "어, 저기 저 남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구나"라고 말한다. 여주인공 역시 비슷한 톤으로 과거의 자신을 설명한다. 광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당히 상치된다. 오히려 60년대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이 택시 잡는 장면이 떠오른다.
'온건한 평화주의자'였던 주인공 오민호와 그의 연인이었던 윤정혜. 5.18의 격랑에 휘말리면서 둘의 사랑은 깨지고, 민호는 임신한 정혜 곁을 떠나 출가하여 불도에 정진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딸 운화의 결혼식을 앞두고 두 사람이 재회한다. 둘의 표정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같지 않다. 비장한 표정이나 울고 짜는 한(恨)의 직접적 표출은 없다.
과장된 신파 연기와 정통 연기의 교차, 중간중간 삽입되는 강렬한 80년대의 노래들, 저항시인 김남주의 칼날같은 시가 곁들여지면서 무대는 에너지가 넘친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구현한 세트를 바탕으로 겉은 명랑함에도 광주의 진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아냈다는 게 이 연극의 힘이다. 설탕을 바른 쓴약이라고나 할까. 신파 연기의 에너지를 현대화시켜 과장 속에서 진실을 담아내는, 재일교포 김수진이 이끄는 신주쿠 양산박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서정주의 시에 송창식이 곡을 부친 '푸르른 날에'를 비롯해 핑크 플로이드의 '어나더 브릭 인 더 월', 노찾사의 '오월의 노래' 등이 적절하게 흐른다. 그런 노래들을 듣다보니 광주와 더불어 80년대가 떠올랐다.
제작 신시컴퍼니. 29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김형중 기자 telos21@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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