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간 조율… 깐깐한 조지 윈스턴도 "베리 굿!"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1.05.12 03:02

조율명장 1호 이종열씨 "사람 속 몰라도 피아노 속은 훤해"
A4 네 장 요구사항 그냥 무시, 선진국 조율사 능력 보고파 일부러 음색 틀어놓은 적도…
"튜닝기 쓰면 기성복 같아져 내 귀 믿고 음정·음색 골라"

"베레좁스키(러시아 피아니스트) 연주 봤죠? 아유, 그 사람은 조율사들한텐 공포의 대상이에요. 피아노를 어찌나 세게 치는지 피아노 줄이 장난감처럼 툭툭 끊어지거든. 또 끊어질까 봐 무대 뒤에서 계속 모니터만 봤는데 몸이 막 꼬이고 미치는 줄 알았어요."

이종열(73)씨는 2007년 '조율명장 제1호'로 뽑힌 우리나라 최정상급 조율사다. 예술의전당을 비롯해 호암아트홀·KBS홀·세종문화회관·국립극장 등 국내 내로라하는 공연장의 피아노를 매만졌다. 올해로 경력 54년째. 크리스티안 짐머만·예프게니 키신·스타니슬라브 부닌·조지 윈스턴 등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두루 만났고, 그들로부터 솜씨를 인정받았다.

값비싼 피아노라도 솜씨 좋은 조율사가 수시로 조여주고 눌러주고 닦아줘야 명품(名品)이 된다. 10일 오전 예술의전당에서 조율사 이종열씨가 음정을 고르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대가(大家)는 대개 까다롭다. 스타니슬라브 부닌은 상아 건반이 달려 있는 20년 된 피아노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다. 맞춰줬다. 조지 윈스턴은 첫 내한 때 A4 용지 4장에 요구 사항을 빽빽이 적어 팩스로 보냈다. 과감히 무시했다. "피아노는 건반 전체(88개)를 한 몸처럼 고르게 해줘야 하는데 그 사람은 '57번 건반은 더 부드럽게' '22번 건반은 더 강하게'라고 써놨어요. 불쾌해서 종이를 탁 덮고 소신껏 조율했어요." 며칠 뒤 한국에 온 윈스턴은 피아노를 쳐 보고 "조율사가 누구냐?" 묻더니 이씨를 향해 "베리 굿(Very good)! 베리 굿!"을 연발했다.

1998년 미켈레 캄파넬라는 전속 조율사와 동행한다고 통보해왔다. '음악 선진국의 조율사'의 능력이 궁금했던 그는 일부러 음색을 살짝 틀어놨다. 그런데 조율사의 방한이 취소됐다. "캄파넬라가 피아노를 쳐보더니 소리가 마음에 안 든대. 그랬겠죠, 당연히." 이씨는 처음부터 새롭게 음을 맞춰나갔다. 캄파넬라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고, 연주를 마친 뒤 "다음엔 따로 조율사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했다.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피아노를 유럽에서 공수해 왔고, 조율도 직접 했다. 연주회 직전, 이씨에게 마지막 조율을 해달라고 한 짐머만은 연주 뒤 2600명 관객 앞에서 "완벽한 조율을 해준 미스터 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씨는 "손가락이 부러지게 열심히 조율해놨는데, 하루종일 받은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라"며 웃었다.

지난 8일 이종열씨가 조율한 피아노를 연주 중인 베레좁스키. /마스트미디어 제공

조율을 하기로 하면, 이씨는 프로그램을 미리 살펴보고 연주자의 연주 기법과 음색을 며칠 내내 고민한다. 건반과 바로 연결된 액션(action·손가락 힘을 줄에 전하는 장치)을 앞뒤로 빼 음색을 바꾼다. 베토벤은 부드럽고 장중하게, 리스트는 특유의 맛을 살리기 위해 고음이 화려하게 돋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연주자 숫자만큼 취향도 다르다. 같은 모차르트라 해도 '쨍그랑 소리가 나게', '보드랍게' 식으로 요구가 다르다.

전북 완주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한 탁발승이 "너는 나중에 소리 나는 직업을 갖겠구나" 했을 때도 '조율사'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고교 3학년 때, 이웃마을 예배당의 풍금을 혼자서 쳐보다가 망가진 풍금을 고치려고 속을 뜯어본 것이 인연이 됐다. 상경한 그는 수도피아노 성수동 공장을 거쳐 삼익피아노에서 조율을 맡았다. 1971년 독립, 연주가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주요 공연장을 주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설 때는 집에서도 양복을 꺼내 입는다. 많은 조율사가 전자튜닝기를 쓰지만, 이씨는 표준음만 튜닝기로 맞추고 나머지는 오로지 귀로 음정과 음색을 고른다. "튜닝기에 맞추면 기성복 같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54년간 그가 공연장에서 조율한 횟수만 3만번이 넘는다. "사람 속은 아직도 감감하고 알 수가 없지만, 피아노는 속을 보면 볼수록 내 말을 쏙쏙 알아듣고 잘 따라와 준다"는 이씨는 "영롱한 음색과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직업이 나는 눈물 나게 좋다"고 했다.


피아노 잘 관리하려면…


이씨는 "조율은 6개월마다 한 번씩 해 주는 게 좋다"고 했다. 피아노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는 22~23도, 습도는 50~60%. 여름에는 제습기, 겨울에는 가습기를 돌려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주는 게 좋다. 피아노 밑에 물그릇을 가져다 놓는 것은 “코끼리한테 비스킷 먹이는 격”이고, '물먹는 하마'류의 제습제는 "약이 터지기라도 하면 가루가 줄에 묻어 줄이 끊길 수 있으니 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충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