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제 전국에 3~4명뿐 외롭게 백골의 맥 이어가

  • 이칠용·(사)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장
  • 사진=사진작가 김기춘

입력 : 2011.04.22 14:58

백골장(栢?H匠)·장경춘
"대팻집, 신주 모시듯 다뤄야 아교는 알뜰하게 사용해라"
흘러내리는 것 핥으라고까지…김평산 스승에게 엄하게 배워

백골(白骨) 하면 '죽은 사람의 몸이 썩고 남은 뼈'를 떠올리지만, 전통 공예에서 백골(栢�H)이란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주로 옛 사찰이나 오래된 목조건물을 해체할 때 나오는 헌 나무)을 활용해 옻(漆)기에 사용하는 골격을 뜻한다. 이것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이 백골장(栢�H匠)이다. '백골'이란 이름 때문인지 무관심한 상황에서 오로지 '백골'문화를 힘겹게 지켜가고 있는 백골장 장경춘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장경춘의 허름한 비닐하우스 작업장은 대한민국‘백골’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그의 손을 거친 오래된 헌 나무들은 아름다운 전통 백골장으로 부활한다

경기도 구리를 벗어나 의정부 쪽 도로를 달리다 보면 밭 가운데에 헌 나무들이 얼기설기 쌓여 있는 검은 비닐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지난해 여름 태풍 피해를 입어 이곳저곳 보수 중인 허름한 작업장 내부에 들어서니 백골장 장경춘과 전수자인 막내아들 재철(36)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비닐하우스는 허름했지만 벽에는 각종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어 그의 깐깐함을 말해 주는 듯했다.

1943년생인 장경춘은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칠부 기능공인 동네 선배 권둔하를 따라 을지로6가 나전칠기 합동공장에 들어갔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합동공장이 한평생 백골장(栢�H匠)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60년대 여름 합동공장엔 백골부 3개, 나전칠기부 4개, 상자(Box)제작실 1개 등 모두 8개의 분업식 공방이 있었죠. 30여명의 장인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백골장 김평산(金平山) 어른을 만나게 됐어요. 17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구절함, 보석함, 서류함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죠. 집에서 한참 어리광을 피울 나이였지만 작업장에선 무섭게 윙윙대며 돌아가는 기계톱 옆에서 선배들의 작업 보조 역할을 하며 생전 처음 만져보는 대패, 톱, 끌 등을 다뤄야 했죠. 가장 힘들었던 일은 다른 직공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 그게 너무 싫어서 기술 배우러 오는 후배들에겐 절대 기술 전수 외에 개인적인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장경춘은 스승 김평산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평산 어른은 항상 '목수란 대패질에 생명을 걸어야 하므로 대팻날 갈기는 물론 대팻집 다루기를 신주 모시듯 해야 한다'고 강조했죠. 어찌나 아교를 알뜰히 쓰는지 나무에 아교칠을 할 때 흘러나오는 것을 입으로 핥으라는 거예요. 올바른 백골장이가 되려면 아교 몇 말은 너끈히 먹어치워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저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물론 아교 값도 비쌌지만 그만큼 모든 재료를 아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였죠."

1967년 군을 제대한 그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故) 김태희(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장인의 공방에서 본격적으로 백골장의 길을 걷는다.

전통 나전칠기의 현대화에 힘쓴 김태희 장인의 공방에서 그는 차(茶) 도구와 탁자 등을 비롯해 안경집, 한약재통 등 각종 공예품 만드는 법을 배웠다.

"70년대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가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위해 건물을 헐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을 따라 목재를 구하기 위해 갔었죠. 여기저기 쌓아놓은 나무 중에서도 문틀, 창호틀, 천정판만 골라내는 스승에게 이유를 물었죠." 김태희 장인은 그에게 "예전 목수들은 나무가 가볍고 옹이가 없고 갈라지지 않는 나무만 골라 문틀과 같이 중요한 곳에 썼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직접 나무를 고르러 다니다 보니 스승의 안목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죠. 이 분야엔 오래된 건물에서 나오는 헌 나무들이 진가를 발휘하죠."

장경춘은 한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나전칠기 사업을 했지만 실패하고 귀국해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 '한미 공예사'를 차리고 전국의 나전칠기 공방에 백골을 공급했다. 열악한 수익구조 탓에 어려움도 많았다. 현재 나전칠기 백골장(栢�H匠)은 전국에 3~4명 정도가 힘겹게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 그만큼 전통 백골이 아닌 변형된 백골을 사용하고 있는 나전칠기인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고 묵묵히 일만 하고 있는 막내 재철(36)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8년째 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백골의 맥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누구나 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각기 자기가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몫은 백골 만드는 기능이 있으니 이것을 제대로 전수시키고 제 물건을 가져다 곱게 치장하여 천년만년 오래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공급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어찌합니까…."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그의 말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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