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못하는 갈매기

입력 : 2011.04.22 17:22




-연극 ‘갈매기’

안톤 체호프 4대 장막극
욕망·갈등 섬세한 묘사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사람도 사자도 독수리도 메추라기도… 생명이란 생명은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젊은 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는 야심차게 쓴 희곡을 한적한 호수를 배경으로 한 마을 무대에 올린다. 배우는 그의 연인 ‘니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온갖 비난뿐이다. 누구보다 그의 어머니 ‘아르까지나’는 작심이나 한 듯 신랄한 비평을 쏟아놓고 결국 공연까지 중단시킨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정원에 모인 러시아 귀족들은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교양을 과시하는 대화를 나눈다. 허상과 엇갈림, 동경과 방황, 연극 ‘갈매기’의 시작과 끝은 한 줄이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자주 올려지는 공연 중 하나인 ‘갈매기’는 ‘바냐아저씨’ ‘벚꽃동산’ ‘세 자매’와 함께 안톤 체호프(1860∼1904)의 4대 장막극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소린 내 한 시골영지의 별장이 배경이다. 작가지망생 ‘뜨레쁠레프’와 그의 어머니인 여배우 ‘아르까지나’, 어머니의 정부인 유명 통속 작가 ‘뜨리고린’, 뜨레쁠레프의 연인이자 배우 ‘니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이 중심축이다. 별 소란 없이 한없이 조용하기만 한 시골영지와 철저히 대비되는,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일상, 내면에 자리잡은 욕망과 갈등, 한계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특별하다.

하지만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적잖은 내공이 필요하다. 가장 단편적으로 접근하면 삼각관계로 얽혀 비극적 파국을 맞는 애정관계가 보인다. 하지만 작품에는 만만치 않은 장치들이 숨어 있다. 외현에는 극중극 형식, 이상과 현실로 양분된 배경, 쓸쓸하고 음산한 호숫가에 걸린 외로운 갈매기가 있고, 내면에는 이루지 못한 꿈, 관습에 부딪히는 혁신, 절망과 죽음, 삶을 빗겨간 예술의 공허가 들어 있다.

젊은 뜨레쁠레프의 야심찬 시도는 좌절됐다. 그의 절망은 ‘갈매기’를 처음 내놓은 체호프가 느꼈을 그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1896년 러시아 알렉산드리스끼 극장에서 초연한 작품은 완벽하게 실패했고 혹평이 줄줄이 이어졌다. “새로운 것이나 낡은 것이나 있을 자리는 넉넉한데 왜 그리 부딪히지?” 극중 대사는 그대로 체호프의 질문이 됐다.

멀리서보면 한 장의 그림처럼 꾸며진 무대는 매우 인상적이다. 파릇한 조명빛을 받아 일렁이는 호수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자작나무 언저리엔 결코 날지 못하는 갈매기가 걸려 있다. 객석 한쪽에 마련된 실내악단의 라이브 연주는 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잔잔하고 조용한 시골 영지의 고풍스러움을 한껏 되살리는 동시에 등장인물의 복잡한 정서까지 대신 전달해준다.

한국 근대연극의 초석을 다진 연극연출가 이진순(1916~1984)을 기리는 헌정공연으로 마련됐다. ‘갈매기’는 그의 마지막 연출작이기도 했다.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함께 꾸몄다. 1966년판 ‘갈매기’에 섰던 배우 김금지가 아르까지나를 서주희와 번갈아 연기한다. 1983년판 ‘갈매기’에 출연한 배우 송승환은 박지일과 뜨리고린 역을 나눴다.

체호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와 ‘갈매기’를 향한 넘치는 애정들이 모인 공연이었지만, 역시 제대로 지켜내기 쉽지 않은 작품이란 것을 확인만 했다. 서울명동예술극장에서 내달 8일까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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