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순간마다 매듭이 있었다

  • 성남문화재단 월간 '아트뷰'

입력 : 2011.04.19 14:22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정봉섭

옛날 지체 높은 여성들이 한복 저고리 옷고름이나 치마허리에 매달던 노리개. 중심에서 반짝이는 옥 · 산호 · 호박 등의 보석 대신 그것들을 단단히 엮고 있는 매듭에 눈길을 둔 적 있는가. 혹은 그 작은 매듭 하나를 만드는 데 백 번이 넘는 손길이 오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일생을 매듭짓는 일에 바쳐온 매듭장 정봉섭 장인을 만나 전통 매듭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우리 고유의 정신세계에 관해 들어봤다.

매듭 안에 인생이 있다

전통 매듭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노리개 같은 여성용 장신구를 먼저 떠올리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매듭은 남녀 구별 없이 일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했다. 돌쟁이 아이의 저고리 앞섶을 여며준 작은 단추, 장성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선비의 위엄을 상징하던 도포 끈과 관복의 후수, 더운 날 손에 들었던 부채의 선추, 그림이나 붓글씨 작품을 매달던 벽걸이, 혼례를 맺을 때 꽃가마를 빙 둘러가며 장식하던 화려한 술, 삶을 다하고 장례를 치르는 날의 상여와 영정에도 매듭은 빠지지 않았다.

올해 일흔넷인 정봉섭 매듭장은 1대 매듭장 아버지 정연수 장인, 2대 매듭장 어머니 최은순 장인에게 전통 매듭을 배웠다.

“워낙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거들면서 매듭을 짰으니 언제부터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지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옛날 시골에 있던 우리 집 방 안에는 늘 상여나 가마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상여 하나에 장식용 술을 230개나 만들었죠. 어머니는 그걸 매달 수 있는 망을 뜨셨고요. 빨강, 노랑, 남색, 초록…색색의 술을 엮어 바늘로 망에 꿰는 일은 집안 식구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같이 했어요. 그때 아마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첫딸을 본 뒤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려고 딸에게 아들 이름을 붙였다. 이름 덕일까. 결국 큰딸에게 가업을 대물림했다.

정 장인은 “어려서는 그저 매듭이 예뻐서 따라 했지만, 좀 더 크고 나니 고생하는 데 비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안 돼 그만두려 했다”며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난 뒤 어느 날 문득 ‘내가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어쩌면 일찌감치 운명 지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듭 일은 아무나 한두 시간 배워서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처음엔 눈으로, 그다음엔 마음으로 익혀야 마지막에 가서 제대로 된 손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게 바로 매듭 일이다. 

매듭을 짓기 전에 먼저 인내하라

성질 급한 사람은 매듭을 배울 때 끈을 엮는 방법부터 묻지만, 정봉섭 장인은 정작 엮는 과정보다는 엮기 전, 그리고 엮은 후에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사전 준비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면 결코 좋은 매듭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한 단계씩 차분히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생사를 가지런하게 정돈합니다. 여기에 고운 색을 입히려면 먼저 베 보자기에 싸서 비눗물에 담근 다음에 푹 삶아요. 풀기가 빠지고 나면 얼레에 걸어놓고 조심스럽게 풀지요. 이 과정이 끝났다고 원하는 색으로 바로 염색하는 건 아닙니다. 먼저 겨자를 물에 옅게 풀어 미색으로 물을 들여야 해요. 그러고 나서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고, 식촛물에 담가 변색을 방지하고 윤기를 살려줍니다. 염색이 끝나면 다시 맑은 물에 헹군 뒤 손으로 잡고 탁탁 쳐서 색상이 얼룩지는 것을 막고 엉킴을 방지합니다. 한번 엉키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풀어도 다 못 풀어요. 아기 달래듯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요. 2~3일 후 실이 완전히 건조되면 엉키지 않게 얼레에 감습니다. 여기까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최종 결과물인 매듭 모양이 달라져요.”

아직 매듭은 시작도 안 했는데, 염색하는 과정만도 이렇게 복잡하다. 여기까지 마친 명주실은 용도에 따라 서너 가닥씩 또는 대여섯 가닥씩 연사한다. 연사한 실을 증기에 쪄서 말린 뒤 다시 꼬아서 끈목을 만들어야 매듭 지을 준비가 끝난다. 이때 깜빡 정신을 놓고 끈목 짜는 순서를 놓치면 처음부터 풀어서 다시 짜야 한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매듭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칠 만하다.

“재료를 다듬는 것부터가 공예의 시작이지요. 물론 매듭을 지을 때도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좋은 매듭을 만들려면 잘 엮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엮인 끈목을 똑바르고 단단하게 조여야 해요.”

쉽고 빠른 걸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진 100% 수공 매듭에서는 기계로 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손맛이 풍겨 나온다.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남다른 견고함과 우아함이 묻어난다.

정봉섭 장인이 선보이는 전통 매듭은 총 30여 가지에 이른다. 국화꽃을 닮은 국화매듭, 생강을 닮은 생쪽매듭, 병아리처럼 귀여운 병아리매듭 등 다양한 매듭을 사용자의 나이와 성별, 용도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 가마나 상여에 사용되는 큰 장식 매듭은 유소流蘇라 불린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도래매듭이 쉬운 듯해도 제일 어렵다”며 “이 매듭을 잘하면 다른 매듭도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매듭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인 역할이므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이 점을 늘 잊지 않으려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매듭, 가족

정봉섭 장인의 아버지이자 초대 무형문화재인 정연수 장인은 열여덟 살 때 우연히 매듭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매듭이 금지됐을 때도 화장실에 숨어 몰래 매듭을 지으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지켰다. 그가 작고한 뒤에는 부인 최은순 장인과 딸 정봉섭 장인이 기법과 정신을 계승했다. 지난 1982년, 정봉섭 장인은 그런 부친을 기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 매듭법을 총동원해 상여를 완성했다. 밤잠을 설쳐 가며 작업한 지 꼬박 1년 만이었다. 고된 작업에 매진하는 바람에 시력도 뚝 떨어졌다.

“매듭 중에는 노리개를 장식하는 작은 매듭뿐 아니라 큰 매듭도 있고, 여성적인 매듭뿐 아니라 남성적인 매듭도 있지요. 아버지는 상여나 가마, 절에서 행사할 때 쓰는 매듭 장식처럼 큰 매듭을 주로 만드셨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며 상여의 네 모서리를 돌려 매듭과 술, 부전을 달았죠.”

1/2 크기의 전시용으로 제작된 이 상여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전통 장례 문화가 사라진 요즘, 매듭이나 술을 용도에 맞지 않게 대충 만들어 쓰는 경우도 많다”며 “제대로 된 상여를 한번 만들어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그렇듯 매듭 일에도 전성기가 있게 마련. 정봉섭 장인도 칠순을 넘기고 나니 조바위 술 등 섬세한 매듭을 지을 때는 손놀림이 예전만큼 예민하지 못하다. 좌식 작업 때문에 목과 허리에 만성적인 통증을 겪다가 2004년 척수종양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제 작업량을 줄이고 다음 세대의 매듭장이 될 두 딸에게 자신의 기법을 전수하는 데 힘쓰고 있다.

맏딸 선경 씨는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지만 부모 곁에서 일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매듭 일을 업으로 삼게 됐다. 선경 씨는 1986년 매듭장 조교로 공인받아 전통 매듭의 4대 계보를 잇고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매듭을 대중화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정봉섭 장인은 큰딸을 보며 “고등학교 때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엉킨 실을 푸는 걸 보고 ‘이 아이한테는 매듭 일을 시켜도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영어 강사로 일하던 둘째 딸 선희 씨도 언니보다는 늦었지만 어머니에게 매듭 일을 배우고 있다.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시간에 걸쳐 같은 마음으로 전통문화를 지켜오는 가족의 모습은 어쩐지 그들이 짓는 매듭을 닮았다.

“처음엔 일손이 부족해서 거들기 시작했어요. 저는 무용수로서 남들보다 체격 조건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재능이 특출하단 느낌도 갖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매듭만큼 제 적성에 맞으면서도 남들 앞에서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 없더라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듭을 놓지 않으셨던 걸 보면서 ‘이 일은 평생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결정한 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박선경)

“일반인 중에도 매듭 공예를 전수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죠. 하지만 1~2년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마자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각별한 애정과 책임감이 없이는 지속할 수 없어요. 힘들 때, 하기 싫어질 때 쉽게 포기하거나 버리게 되더라고요. 매듭 공예가 가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죠.”(박선희)

정봉섭 장인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매듭을 손에서 놓는 날이 죽는 날’이라고 할 만큼 평생을 매듭짓는 일에 바쳤다”며 “나 역시 매듭을 짓지 않고는 하루도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정신이 또렷한 날까지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의 손에는 예쁜 국화매듭이 완성돼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생김이 정 장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약력

1971~1988 제1~13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1985, 1987 한·중·일 3국 국제 매듭전 출품
2004 무형문화재 초대전 <매듭장 최은순家 매듭으로 잇는 4대 이야기>
2005 전통공예전 출품(워싱턴 한국문화원)
2006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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