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of Art] 독특한 현대 미술로 '기업의 개성'을 표현하다

  • 윤태건·THE TON 대표

입력 : 2011.04.18 16:04

기업의 공공미술
'주식회사 예술가' 제프 쿤스… 신세계·삼성·CJ 등 구입
'공공미술 종결자' 보롭스키… 흥국생명·귀뚜라미보일러에 설치

1980년대 일본의 대기업들이 싹쓸이하다시피 수집했던 인상파 그림들은 이젠 식상해졌다. 전 세계의 큰 손들은 이제 반 고흐나 고갱의 작품이 아니라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리처드 프린스, 마크 퀸 등 미술계 관계자가 아니면 이름도 생소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기업들이 열광하는 현대미술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도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미술 작품을 보면 기업들이 사랑하는 작가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주식회사 예술가': 제프 쿤스와 신세계, 삼성, CJ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생존 작가 중에서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제프 쿤스(Jeff Koons)는 사업가적 감각과 현란한 대중문화를 차용한 작품 덕택에 앤디 워홀의 후계자를 자처한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한때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 되면 '고뇌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주식회사 예술가'의 CEO인 셈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입이 딱 벌어지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벌써 공공미술 작품만 3점이 들어와 있다. 공교롭게도 3점 모두 신세계, 삼성, CJ 등 형제기업이 경쟁하듯 구입했다.

당장 4월 18일에 서울 신세계 백화점 본점 본관 옥상공원에 '세이크리드 하트(Sacred Heart)'가 설치되고, 29일부터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언론에서 추정하고 있는 가격은 자그마치 300억원. 이전에 삼성의 리움미술관은 '리본 묶은 매끄러운 달걀'을 2009년에 구입했었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CJ 계열의 골프장인 제주 나인브릿지에 가면 '풍선 꽃(Balloon Flower)'을 만날 수 있다.

과천의 코오롱 본사 로비에 설치된 러시아 작가 그룹 AES+F의 ‘액션 하프 라이프’(위 사진), CJ 계열 골프장인 제주 나인브릿지에 설치된 제프 쿤스의 ‘풍선 꽃’(아래 사진). / 윤태건 제공
'흉물'과 '걸작' 사이에서: 애증의 관계 스텔라와 포스코

포스코와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는 애증의 관계다. 서울 삼성동 포스코사옥 앞에는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이 놓여 있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그야말로 짓이겨 놓은 고철덩어리다. 이 공공미술품은 태생부터 입방아에 올라 많은 야사(野史)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에는 "정치권의 비자금과 얽혔다더라", "설치 당시 고철덩어리인 줄 알고 고물상에서 들고 갔다가 겨우 찾았다더라" 등의 소문들이 돌아 여러 가지로 포스코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아마벨'을 둘러싸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라는 반응과 세계적 대가의 '걸작'이라는 반응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금은 친절하게도 소나무 수십 그루로 작품을 잘 안 보이게 가려버렸다. 사랑과 미움의 교차. 포스코와 스텔라의 관계다.

틈새를 노린 나만의 취향: 코오롱과 AES+F, 니키 드 생팔

코오롱은 유명하지만 틈새에 가까운 작가들의 공공미술을 주로 선보인다. 덕분에 다른 기업과 확실히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천의 코오롱 본사 로비에는 AES+F라는 러시아 작가 그룹의 '액션 하프 라이프(Action Half Life)'가, 야외에는 오래전부터 프랑스 작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의 '미(美)의 세 여인(Les Trois Graces)'이 설치돼 있다. 니키 드 생팔은 이미 지명도가 있고, AES+F는 최근 러시아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급부상하고 있지만 의외로 국내 다른 기업에서는 수집을 거의 하지 않은 편이다. 코오롱의 독특한 취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공공미술 종결자: 조나단 보롭스키와 흥국생명

흥국생명 신문로 사옥은 조나단 보롭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으로 더 유명해졌다. 이제는 사람들이 흥국생명 신문로사옥은 몰라도 "망치질하는 거인 있는 곳"이라고 얘기하면 알아듣는다. 2002년에 설치됐으니 벌써 10년이 가까웠건만 아직도 국내의 대표적인 공공미술을 언급할 때마다 여전히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덕분에 흥국생명은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그 사이 구입 대비 가격이 족히 4배 이상은 올랐고, 보수적 기업이미지에 문화 기업의 컬러를 입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공공미술 종결자로 아직도 군림하고 있는 '망치질하는 사람'에 대한 흥국생명의 사랑은 영원할 것 같다.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사옥 앞에 서 있는 조나단 보롭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보롭스키의 다른 작품으로 무려 30m 높이의 '하늘을 향해 걷다(Walking to the Sky)'도 서울 화곡동 강서구청 사거리의 귀뚜라미보일러 본사에서 만날 수 있다.

공공미술도 이제는 미디어다: SK, 신한금융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인 아트센터나비의 영향으로 '미디어아트는 곧 SK'라는 나름의 등식이 성립된 듯하다.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건물의 외관을 미디어 작품으로 만든 것은 당시만 해도 상당히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일이었다. 일찍부터 미디어아트의 한 길을 걸어왔다는 점에서 특별히 작가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지순한 내지는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참 공사 중인 서울 중구 회현동 신한금융의 신사옥 외관에는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얼굴 영상의 입에서 분수가 나오는 공공미술작품을 설치해 유명해진 스페인 출신 작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의 미디어 작품이 올해 말쯤 선보일 예정이다. 이 작가의 공공미술 작품으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이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