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인생 불안한 연기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1.04.13 23:46

연극 '갈매기'

무심한 자작나무들이 서 있다. 중앙에 펼쳐진 호수는 죄 없는 푸른 빛이다. 연극 '갈매기'(연출 김석만)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으로 무대를 연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한 마샤(김소진)의 첫 대사는 "이건 내 인생의 상복(喪服)이에요. 난 불행해요"다. 한물간 여배우 아르카지나(김금지)와 작가를 꿈꾸는 아들 트레플레프(김수현)의 모자(母子) 관계도 물과 기름처럼 불화한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쓴 '갈매기' 속 인물들은 다 불만투성이다. 사랑과 증오, 질투와 단념, 꿈과 현실, 삶과 죽음 등 욕망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한다. 승자(勝者)는 없다. 도망치고 싶어도 물가를 떠날 수 없는 갈매기 같다. 때론 희망을 품지만 방황하고 서성이다 끝나는 인생 말이다.

연극‘갈매기’2막에서 트레플레프(김수현·왼쪽)와 니나(한선영)가 2년 만에 재회한 장면. /명동예술극장 제공
12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이 연극은 덜컹거렸다. 더블 캐스팅이라곤 하지만 김금지의 아르카지나는 연인 사이인 박지일의 트리고린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김금지는 사실주의 무대에서 연극성 강한 연기를 밀어붙였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 히스테릭한 감정 변화는 배역의 설정과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 드라마의 결을 헝클었고 감상을 방해했다. 혼자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1막과 2막 사이에 꿈부터 폐허까지 큰 낙폭을 보여줘야 하는 한선영은 맑고 신선했지만 2막의 니나로서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언제든 내 생명이 필요하면 가져가세요"라는 고백처럼 더 거칠게 부서져야 한다.

하지만 김수현은 고요부터 폭발까지 농밀한 집중력과 호흡으로 관객을 몰입시켰다. 박지일·김소진·윤여성(도른)·정상철(소린)의 연기도 안정적이었다. 겹겹의 두루마리를 이용한 신선희의 무대미술은 창의적이진 않아도 품격이 있었다. 중요한 굽이마다 나온 라이브 연주가 서정성을 살려줬다.

이번 '갈매기'는 연출가 고(故) 이진순을 기리는 무대다. 김금지·서주희가 아르카지나, 송승환·박지일이 트리고린 역을 나눠 맡는다.

▶5월 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