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코 곤다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1.03.10 03:24 | 수정 : 2011.03.10 03:33

'클래식 졸음 관객' 더 늘어… 그 이유는?
저녁 먹어서 배는 부르고 조명은 컴컴… 음악은 잔잔
1200여명 중 110명 꾸벅꾸벅… "앙코르" 할 때만 벌떡 깨서 박수
공짜표說… 기업 마케팅 늘면서 '끌려온 관객'도 늘어나
수면 유도說… 전문가 "의학적으로 잠자기 최적의 환경"
새로운 계급 출현說… 귀족만 향유할 땐 낮에 공연, 시민계급 위해 밤으로…
선진국에선… 오전·정오·오후 등 공연 시간 다양화

핀란드 출신 세계적 지휘자인 유카페카 사라스테(Saraste)와 국내 정상급 교향악단인 서울시향이 호흡을 맞춘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석 매진'답게 콘서트홀 1~3층 2523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곡이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사라스테는 일곱 번의 커튼 콜에 화답했다.

1층 D블록 뒷줄에 앉아 있던 회사원 황희원(47)씨도 기립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쳤다. 황씨는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중에서 줄리엣이 등장한 이후 부분은 들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퇴근 후 부랴부랴 밥을 먹고 뛰다시피 공연장에 들어갔어요. 자리에 앉으며 '이러다 졸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졸더라고요." 황씨는 "처음엔 눈치를 봤지만 함께 간 동료가 입까지 벌리고 자기에 나도 편한 마음으로 내리 잤다"며 웃었다.

1층 청중 1200여명 가운데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거나 의자에 기댄 채 자는 사람만 50여명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는 사람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 전날(23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안드라스 시프(Schiff)의 피아노 독주회에서는 그보다 많은 110여명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엔 2년 만에 클래식 공연장을 찾은 마케팅 컨설턴트, 선물받은 표로 왔다는 학원강사, 음악 칼럼니스트인 현직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1999년부터 예술의전당 공연사업부에서 근무하는 양우제 하우스매니저는 "옆자리 관객이 코 곤다고 항의하는 관객이 1주일에 서너 번은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 거장(巨匠)의 내한 공연, 10만원을 웃도는 비싼 티켓값 그리고 자부심이 얽혀 있는 클래식 공연장에서까지 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의전당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안호상 서울문화재단 대표는 "클래식 공연장에서 자는 사람들이 최근 더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단체 초대, 기업 마케팅 등으로 자발적이지 않고 끌려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비싼 공연을 가도 가운데가 뻥 뚫리거나 우르르 자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연주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기업이 협찬시 협찬 금액의 30%가 초대권으로 나간다.

'클래식 공연장의 수면 유도설'도 있다. 한진규 서울수면센터 원장은 "좌석에 가만히 앉아서 듣고, 리듬은 대부분 잔잔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조명도 어두컴컴해서 공연장은 잠자기 최적의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한 원장은 "하지만 이때 뇌의 절반은 때맞춰 주인을 깨울 수 있게 1~2초짜리 부서지는 잠을 자기 때문에 코를 골다가도 좋은 장면이 나오면 알아서 박수치고 '브라보!'도 외친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계급의 출현설'도 있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근대화가 되면서 클래식 공연의 수혜자가 귀족 계층에서 시민계급으로 넘어오면서 밤에 열리는 공연이 많아졌다"며 "시민계급의 문화 향수를 위해 공연이 낮에서 밤으로 늦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 등에서의 공연은 오후 8시 시작이 대부분이다. 박 대표는 "국내 공연장들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의 음악 선진국처럼 오전 11시, 정오, 오후 4시 공연을 다양하게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9일(수요일) 도쿄와 그 인근에서 열린 클래식 공연은 오전 11시 30분과 오후 2~3시, 늦어도 오후 7시에는 시작했다.

곡이 난해한 경우 휴식 없이 긴 연주를 60분 이상 할 경우 조는 관객이 많지만 의외로 연주를 못하는 경우에는 조는 관객이 줄어든다는 설명도 있다. 고희경 대성디큐브아트센터 극장장은 "연주자가 정말 연주를 못하면 청중이 짜증 나서 오히려 졸지 않는다"고 전했다.

음악인들은 어쩔 수 없이 밤에 하는 클래식 공연을 봐야 한다면 "미리 많이 듣고, 곡이나 작곡가에 얽힌 배경 지식을 공부한 뒤 가라"고 입을 모은다. 한 클래식 전문기자는 "지루해질 때마다 공연장 안에 '안경 낀 사람은 몇명, 예쁜 여자는 누구'하는 식으로 재밋거리를 찾는다"고 힌트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