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3.03 03:01
가짜 그림 수집하는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송향선 위원장

이 사람, 가짜인 줄 알면서도 산다. 천경자·박수근·이중섭 등 우리나라 근현대 유명 화가들의 위작(僞作) 말이다. 2003년부터 사 모은 가짜가 30점가량이다. 위작을 알아야 진품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0점이 모이면 전시회도 할 예정이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감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향선(64) 가람화랑 대표다.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사무실. "까딱하면 내가 가짜 그림을 만들어 판다는 소문이 화랑업계에 떠돌 수 있다", "미술품에 대한 대중의 오해가 생길 수 있다"며 절대로 보여주지 않겠다던 송 대표가 결국 직원을 시켜 캐비닛에 보관했던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림 속에서 노란 화관(花冠)을 쓰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타히티 원주민 풍의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1989년작 '막은 내리고' 위작이에요. 원작과는 크기도 다르고 화면 구성도 달라요. 원작에는 이 여인의 오른쪽에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 한 명이 더 있죠." 송 대표가 도록을 뒤져 원작을 보여줬다. 원작과 명암과 입체감 등 디테일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송 대표는 이 그림을 2002년 4월 20만원에 구입했다. "진짜는 4억원 정도 합니다. 천경자 화백 '미인도' 사건 때 그 그림을 위조했다고 진술한 사람한테 샀어요. 본인은 '그냥 그려본 거'라고 하더군요."

천경자의 '미인도'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10·26의 주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소유였던 천경자의 '미인도'를 포스터에 쓰면서 시작됐다. 천 화백은 "내가 낳은 아이를 못 알아보겠느냐"며 가짜라 했지만 전문가들은 감정 결과 진품이라고 판정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99년 동양화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것"이라고 진술해 파문이 일었다.
송 대표는 이 밖에도 이중섭·박수근·손응성 등의 위작 네댓 점을 더 보여줬다. 위작 감정을 의뢰한 소장자로부터 구입하거나 기증받은 것이다. "20만~30만원 선에서 구입했죠. 가짜는 원작자의 지명도에 따른 가격 차이가 별로 안 나요."
가짜 미술품 공부는 감정의 기본. 위작 감정의 대가인 토머스 호빙(Hoving·1931~2009) 전(前)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은 "위작 감정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품을 접해봐야 한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일류 위조꾼을 만나 위조품 거래와 관련된 몇 가지 비밀을 직접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의 상황은 다르다. 2007년 이중섭·박수근 위작 유통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압수한 위작 2800여점으로 전시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전례가 없고, 위작 중 판매된 것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여겨져 소유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무산됐었다. 지난해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런던 경시청이 적발한 가짜 그림들과 조각들을 놓고 위작 전시회가 열린 것과는 대비된다. 송 대표는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술사학도들이나 미술학도들의 감식안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위작 전시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화여대 동양화과 출신인 송향선 대표는 1974년 지금은 없어진 문헌화랑에 취직해 박수근 10주기 전시회를 맡는 등 대가 작품과 인연을 맺었다. 1977년 가람화랑을 열었다.
2003년부터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감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 대표는 2005년 이중섭 유족이 직접 팔려고 내놓은 작품이 가짜라는 주장을 협회 차원에서 제기했다. 미술계는 뒤집혔고, 검찰 수사 결과 가짜로 밝혀졌다. "이런저런 논란을 겪었지만 그 덕에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였던 위작 유통 문제가 많이 정리됐어요. 이젠 손님들도 감정서가 없으면 작품을 사지 않으니까요."
그는 더 이상의 위작 시비를 막기 위해 박수근·도상봉·박고석 등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 도록) 발간을 준비 중이다. 박수근 도록은 연내에 나온다. 그에게 위작을 감별할 수 있는 '비법'을 물어보았다. "감(感)이에요. 후각 같은 거죠. 절대음감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듯이 가짜 그림을 감별해내는 동물적 감각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 정답: 왼쪽이 진품, 오른쪽이 위작
왼쪽은 천경자 화백의 1989년작 ‘막은 내리고’ 진본. 오른쪽 위작은 진품과는 달리 여인이 한 명이고, 명암법과 빛깔 등 디테일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