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12.23 16:01
카미유 피사로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만큼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그를 빼놓고는 인상주의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그는, 늘 맏형 노릇을 하면서, 개성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었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움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젊은 쇠라를 따라 점묘법을 시도하기도 하였죠.
또한 폴 고갱이 화가로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폴 세잔에게는 많은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후에 세잔은 “피사로는 나에게 아버지와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그에 그림에 관한 열정은 평생 꾸준했습니다. 늘 살롱에 출품했고, 8회에 걸쳐 열렸던 인상주의 전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여하였습니다. 아들에게도 그림을 권유해 결국 화가로 만들었던 그는 진정 그림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레데릭은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외삼촌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사로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사로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는 피사로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죠. 사실 아버지는 그가 돌아와 자신의 사업을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피사로는 유학 생활동안 그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레데릭은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외삼촌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사로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사로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는 피사로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었죠. 사실 아버지는 그가 돌아와 자신의 사업을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피사로는 유학 생활동안 그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피사로는 17세 되던 해 세인트토머스섬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사업보다는 늘 야외에서 그림그리기를 즐겼습니다.
피사로가 44살 되던 1874년 파리의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제 1회 인상주의 전이죠. 이들과 어울리던 피사로는 이 전시에 여섯 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전시는 4주 동안 열렸고, 35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가지만, 그들의 평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실력에 관해 항상 겸손했습니다. 그가 그림을 공부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기질은 촌스럽고 투박하다. 아마 많은 노력을 해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피사로가 44살 되던 1874년 파리의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제 1회 인상주의 전이죠. 이들과 어울리던 피사로는 이 전시에 여섯 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전시는 4주 동안 열렸고, 35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가지만, 그들의 평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실력에 관해 항상 겸손했습니다. 그가 그림을 공부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기질은 촌스럽고 투박하다. 아마 많은 노력을 해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피사로는 평생을 그림과 함께 살다가 73세가 되던 19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미유 피사로답게 그는 죽기 얼마 전 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외부로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르아부르 항구근처의 호텔에 묵으며 창가에서 그림을 그렸던 거죠.
그의 그림은 한눈에 우리를 사로잡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면, 그의 온유한 성품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은 한눈에 우리를 사로잡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면, 그의 온유한 성품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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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영상 제공 : 서정욱 갤러리 대표 서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