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12.23 03:01
국립극단 창단 공연 '오이디푸스' 주연 이상직
운명과 싸우는 反영웅적 인물 맡아… "연극 끝나면 다시 밭 갈러 가야죠"
재단법인 국립극단(예술감독 손진책)의 창단공연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 작·한태숙 연출)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 역을 맡는 배우 이상직(44)은 이 연극을 '기암절벽'에 빗댔다. 22일 서울 서계동의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이씨는 "어려운 배역이라 긴장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면서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연극이 산 같아요. 다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더 높은 산이 보이는 거죠. 거기 닿으려면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조바심은 없어요. 쉬었다가 가고 돌아서도 가고…."

연극 '브리타니쿠스' '우먼 인 블랙' '코펜하겐' 등으로 기억되는 이상직은 눈빛과 몰입이 좋은 배우다. 국립극단의 간판이었다. 연출가 한태숙은 "그를 무대에 세워놓으면 불쌍해 보인다. 순진한데 질긴 것도 같고, 속이 다 비치는 배우"라면서 "평범하고 반(反)영웅적으로 재해석한 오이디푸스를 표현하기에 적임자"라고 했다.
희랍비극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神託)을 듣고 운명과 싸우는 영웅이다. 그는 "아침에는 네 발, 정오에는 두 발, 황혼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은?"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되지만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상직은 "우리 삶도 자주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서 "'오이디푸스'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에는 업(業)대로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라고 했다. 지난 7월 18년 이상 몸담았던 국립극단을 떠나 전남 구례 지리산 화엄사 아랫마을로 들어가 농부가 된 그의 인생도 필연일까?
"귀농(歸農)은 10여년 전부터 마음에 품었다가 실행에 옮긴 거예요. 구례는 자연이 좋고 사람들이 소박해요. 그곳 사람들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를 건져 올려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요. 거기서 뿌리내리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일궈낼 겁니다."
'오이디푸스'는 한태숙의 대표작 '레이디 맥베스'와 같은 원초적인 에너지와 강렬한 무대언어가 기대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잔혹한 장면은 절벽처럼 깎아지른 수직의 판 위에서 펼쳐진다. 오브제 예술가 이영란이 참여하고, 정동환·박정자·서이숙·박상종 등 출연진도 단단하다.
"텃밭에 심은 배추랑 무를 추수도 못 하고 올라왔어요. 이 연극 끝나면 다시 구례로 갑니다. 연극인들께는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겨울 농한기엔 언제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웃음)
▶1월 20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