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콘서트] 바이올린은 희망을 싣고… "음악이 藥이랍니다"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0.12.21 03:02

어린이 환자들과 함께한 '우리동네 콘서트' 마지막 무대
병상의 아이들도 힘찬 연주에 귀 '쫑긋' 정호승 시인은 자작詩로 위로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희주(13·가명)는 침상에 누운 채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강주미씨가 함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할 때였다.

"다음 레슨 때 저 곡을 배우려고 했는데…."

20일 오후 4시 서울대 어린이병원 4층 소아암센터. 20여명의 어린이·청소년 환자가 매일같이 항암치료와 수혈을 받는 곳이다. 신현수·강주미씨가 널찍한 병상 입구에서 보케리니의 '미뉴에트'와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했다. 희주는 막 척수검사를 마친 뒤라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두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손에서 놓지 않던 바이올린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로비에 어린‘청중’들이 모여들었다. 김남윤 교수의 바이올린 오케스트라가‘우리동네 콘서트’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일곱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희주는 지난 10월 26일 백혈병 진단을 받기 전날까지 레슨을 받았다. 희주 엄마는 "아이가 힘이 없어서 그런지 '바이올린이 무거워 들 수 없다'고 해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신현수·강주미씨는 희주 침상 앞에서 '지고이네르바이젠'을 한 번 더 연주했다. "희주야, 힘내! 꼭 나을 거야." '병실연주회'를 마친 현수씨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2008년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신현수씨와 지난 10월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강주미씨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도 주목받는 실력파 연주자다. 두 사람은 이날 4층 병동을 찾기에 앞서, 스승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이끄는 바이올린 오케스트라 단원 40명과 함께 서울대 어린이병원 1층 로비에서 음악회를 가졌다. 올해 조선일보서울시향이 주최하고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한국문화예술위원회·한국메세나협의회·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우리동네 콘서트' 캠페인 마지막 무대로 소아암 등 어린이 환자와 가족을 위한 무대에 선 것이다.

신현수(오른쪽)·강주미씨가 어린이병원 4층 소아암센터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희주를 위해 연주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병원 1층 로비는 흰색과 노란색 등 이름 모를 주사약 링거병을 매단 거치대와 휠체어에 앉은 어린이 환자들과 보호자 100여명으로 가득 찼다. 김남윤 교수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귀에 익숙한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로 문을 열어, 힘찬 선율이 인상적인 하차투리안의 '칼의 춤',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를 들려줬다. 작가 최명란씨가 초등학교 1학년 쓰기 교과서에 실린 자작시 '수박씨'를 읽어주자 어린 청중들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빛났다. "아~함/ 동생이 하품을 한다/ 입 안이/ 빨갛게 익은 수박 속 같다/ 충치는 까맣게 잘 익은 수박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 링거병을 매단 외아들 상훈(12·초등학교 5년)과 함께 온 하영애(42)씨는 연방 눈시울을 훔쳤다. "남편과 아이, 세 식구가 자주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아이가 아픈 뒤로 못 갔어요. 병원에서 이렇게 음악을 들으니 괜히 눈물이 나네요"라고 했다.

정호승 시인이 자작시‘바닥에 대하여’를 낭송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정호승 시인이 '자신이 가장 힘든 바닥에 있을 때 썼다'고 소개한 자작시 '바닥에 대하여'를 낭송할 때도 그랬다.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씨는 "아이가 밥은 물론 물도 못 삼키는 걸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다"면서 "지금이 '바닥'인지 모르겠지만, 좀 더 버텨봐야겠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는 '미션 임파서블' 같은 박진감 있는 영화 음악과 크리스마스 캐럴로 음악회를 마무리했다. 종근당 고촌재단이 음악회에 참석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학용품 세트를 선물했다. 자리를 뜨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다시 병과 맞설 시간이라는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