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첼로가 들려준 건 '꿈과 희망'…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0.12.01 23:24

한국판 '엘 시스테마'… 구로구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 첫 공연
어려운 가정 어린이들 음악교육
"물집 잡히고 굳은살 박혔지만 하늘만큼 땅만큼 재미있어요"

지난 30일 저녁, 서울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만난 은지(가명·9)는 잔뜩 들떠 있었다. 6개월간 갈고 닦은 바이올린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드디어 왔기 때문이다. "왼손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힌 것 보이죠? 물집이 잡혔다가 터져서 아문 거예요."

이날 580석짜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선 구로구 초등학교 3학년 30명으로 이뤄진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 데뷔공연이 열렸다. 바이올린과 첼로로 이뤄진 챔버 오케스트라는 바흐와 모차르트 미뉴에트와 하이든 '놀람 교향곡' 2악장, 슈베르트 '군대 행진곡', 그리고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장난감 교향곡'을 연주했다. 꼬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대기실에서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다 선생님께 불호령을 맞았지만, 무대에 오르자 의젓한 '연주자'로 변신했다. 청바지와 푸른 티셔츠로 연주복까지 맞춰 입은 어린이 오케스트라는 앙코르곡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려줬다.

 
열 살배기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음악은 어떤 미래를 보여줄까. 서울시향의 음악 교육프로그램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가 지난달 30일 창단 6개월 만에 첫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구로문화재단 제공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는 서울시향(대표 김주호)이 서울시와 함께 구로구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 가운데 형편이 어려운 가정 어린이와 중산층 자녀를 섞어 만들었다. 오케스트라 교육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자존감을 높이고, 재능 있는 연주자를 키우기 위해서다. 국내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서울시향 단원 출신 연주자들이 교사로 나서고, 바이올린과 첼로 등 악기를 무상으로 빌려준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훈씨와 첼리스트 서광욱씨 등 5명이 한 반(6명)씩 맡아 아이들을 가르친다.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음악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를 본뜬 것이다.

은지는 간병인으로 일하는 엄마(46), 고교생 언니와 함께 사는 기초생활수급가정 자녀다. 엄마는 중국 옌지가 고향인 중국동포다. 바이올린은 은지에겐 더없이 좋은 친구다. 집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다가 끝나면, 장롱 속에 소중하게 모셔둔다. 은지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게 하늘만큼 땅만큼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김영훈(52)씨는 이날 지은(가명·9)이가 빠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빠와 함께 찜질방에 기거하면서도 여름방학 때까지 연습에 꼬박꼬박 나왔던 아이다. "8월까지는 사회복지사가 데리고 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9월부터 사회복지사의 지원이 끊겼다"면서 "아버지가 차비를 놓고 가는 걸 잊어버렸다면서 아이가 전화를 해왔을 때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이날 공연 뒤 늦은 저녁 겸 뒤풀이 자리에서 김영훈 음악감독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소주잔만 연거푸 비웠다. "악기를 시작한 지 몇 달 안 돼서 동요 '나비야' 정도 연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멋있지 않나요? 이번엔 '장난감 교향곡'을 줄여서 했지만, 내년엔 전 악장을 정식으로 연주할 계획입니다." 그는 "아이들이 처음엔 얘기도 잘 안 하고 쭈뼛쭈뼛하더니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했다.

서울시향과 서울시는 2013년까지 구로구에서 매년 초등학교 3학년생 30명을 뽑아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를 육성한다. 엄연숙 서울시 문화예술과장은 "자치구의 호응도에 따라, 매년 새로 지역을 선정해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