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11.17 18:46
이 그림은 27살 쯤 된 청년이 자신을 그린 자화상입니다. 이 남자에게는 사랑스런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에밀 이라는 예쁜 아이도 있습니다. 생활형편도 남부럽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시작한 증권 중개일로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죠. 이 남자는 폴 고갱입니다.

고갱은 어릴 적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파리에서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페루로 가는 도중 아버지를 잃고, 6살 때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나 형편이 너무 어려워 17세 부터 외항선을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증권 일을 하면서 형편이 나아지게 되고 25살에 결혼을 하여 이제야 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겁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고, 또 맘에 드는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습니다. 30대 중반 무렵 고갱은 결심을 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고갱은 고흐와의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이 자화상은 고갱이 고흐에게 선물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겁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고, 또 맘에 드는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습니다. 30대 중반 무렵 고갱은 결심을 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고갱은 고흐와의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이 자화상은 고갱이 고흐에게 선물한 그림입니다.

고흐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수도하는 승려로 그려놓았습니다. 또한 고흐는 고갱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를 위해 해바라기도 그렸습니다.
내성적이었던 고흐에게 있어서 항상 거침이 없었으며, 세상경험도 많았고 자신감 넘쳤던 고갱은 멋진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고갱이 늘 자기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고흐와 함께하던 아를에서의 어느 날, 고갱은 고흐에게 한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이 그림입니다.
그림 속의 고흐는 그저 해바라기를 그리는 볼품없고 초라한 화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흐는 크게 화를 냅니다. 자기가 이렇게 밖에 안보이냐는 거였겠죠? 고갱도 사과하지 않았을 겁니다. 솔직한 표현방식이 그의 스타일 이었으니까요.
내성적이었던 고흐에게 있어서 항상 거침이 없었으며, 세상경험도 많았고 자신감 넘쳤던 고갱은 멋진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고갱이 늘 자기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고흐와 함께하던 아를에서의 어느 날, 고갱은 고흐에게 한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이 그림입니다.
그림 속의 고흐는 그저 해바라기를 그리는 볼품없고 초라한 화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흐는 크게 화를 냅니다. 자기가 이렇게 밖에 안보이냐는 거였겠죠? 고갱도 사과하지 않았을 겁니다. 솔직한 표현방식이 그의 스타일 이었으니까요.

결국 화가 난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경찰서까지 다녀온 고갱은 주저 없이 고흐를 떠납니다.
고갱은 아니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자기 길로 가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고흐는 마을에서 쫓겨나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됩니다.
고갱은 언제나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천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갱은 자신의 그림을 위해 멀리 멀리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납니다. 타히티는 고갱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아무런 불빛도 없는 처음 그대로의 자연, 고갱은 아예 원주민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타히티의 모습과 타히티의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작품 신의 아들을 보면, 아기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검은 피부의 원주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상식적인 그림은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그리는 경우는 있어도 저렇게 출산 후에 누워있는 마리아를 그린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화가 고갱은 이렇듯 성서속의 이야기들을 재현하는 그림에서조차 자신의 표현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고갱의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고갱이 그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쓸쓸해 보입니다. 타히티에서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55세의 고갱은 병마와 싸우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고갱은 아니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자기 길로 가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고흐는 마을에서 쫓겨나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됩니다.
고갱은 언제나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천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갱은 자신의 그림을 위해 멀리 멀리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납니다. 타히티는 고갱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아무런 불빛도 없는 처음 그대로의 자연, 고갱은 아예 원주민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타히티의 모습과 타히티의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작품 신의 아들을 보면, 아기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검은 피부의 원주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상식적인 그림은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그리는 경우는 있어도 저렇게 출산 후에 누워있는 마리아를 그린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화가 고갱은 이렇듯 성서속의 이야기들을 재현하는 그림에서조차 자신의 표현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고갱의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고갱이 그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쓸쓸해 보입니다. 타히티에서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55세의 고갱은 병마와 싸우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1919년 작가 서머셋 몸은 파란만장했던 고갱의 인생을 소재로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였고, 제목은 달과 6펜스입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chosun.com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자료·영상 제공 : 서정욱 갤러리 대표 서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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