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라흐마니노프曲(협주곡 3번)… 그래서 더 끌리죠"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0.11.11 03:02

13·14일 서울서 이스라엘 필과 협연하는 백건우
"연습하면 실수 안 하느냐고요?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랍니다"
오늘 밤엔 G20 영부인들 앞 연주

불 꺼진 객석 너머 무대 위에서 중년의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꾸부정한 어깨에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피아니스트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차례 같은 부분을 되풀이했다. 힘찬 타건(打鍵) 사이로 이따금 거친 호흡이 들렸다. 9일 오후 서울 한남동 소공연장 일신홀. 올해 연주 인생 45년을 넘긴 백건우(64)는 여전히 '연습 중'이었다. 쇼팽 왈츠 모음곡,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1번…. G20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각국 영부인들이 11일 밤 모이는 리움미술관에서 연주할 곡들을 다듬고 있었다. 백건우는 13일과 14일에는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협연한다.

명연주자에게 이런 연습이 아직도 필요할까 싶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달 말 아내(배우 윤정희)가 인도 뭄바이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함께 갔는데 매일 뭄바이의 음악학교에 가서 연습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만만한 작품이 아니다. 제대로 연주하려면 몸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지만 그는 시합을 앞둔 검투사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백건우는“1970년대 지방 연주를 다닐 때는 변변한 공연장이 없어 영화관에서 연주한 적도 있었다. 그날 연주할 피아노가 리어카에 실려오는 것도 봤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대한민국은 완전히 선진국”이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공연 때 건반을 놓치거나 잘못 짚으면 어떻게 되는가.

"줄리어드 때 스승인 로지나 레빈(Lhevine)이 다른 사람의 연주회에 다녀와서 흠만 잡는 제자들에게 '넌 연주회 가서 틀린 곳만 찾다가 왔느냐'고 나무란 적이 있다. 사람이 컴퓨터도 아니고, 어떻게 실수 없이 연주할 수 있는가. 루빈스타인도 그랬고, 호로비츠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이 마음에 와 닿는지가 문제다."

―주빈 메타와는 처음 협연한다.

"뉴욕 필 지휘할 때 몇 번 봤는데, 음악적으로 워낙 탄탄한 지휘자다. 동양인(인도)으로서 서양 음악을 저렇게 완벽하게 장악한다는 게 대단하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 녹음을 했는데, 유명한 2번보다 3번을 더 많이 연주한 이유는 무엇인가.

"2번은 '영화음악'이라고 할 만큼 영화에도 많이 쓰여 대중적이다. 3번은 음악이 복잡하고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나 지휘자에게도 어려운 작품이다. 피아니스트 입장에선 자신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더 큰 편이라서 끌린다고 할까."

라흐마니노프 3번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삶에도 중요한 전기(轉機)가 됐다. 그가 열다섯 살 때 뉴욕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이 곡을 연주했는데, 마침 뉴욕 필 지휘자 번스타인이 그 연주를 듣고 "그 아이를 도와주라"고 콩쿠르 주최측에 귀띔했다. 덕분에 백건우는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유학,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됐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매우 호소력이 강하다. 듣는 사람이 금세 음악에 빨려들게 만든다.

"애국심과는 약간 다른데, 자기 땅에 대한 애착 같은 것이 담겼다. 라흐마니노프가 뉴욕에서 지낼 때 롱아일랜드에 집을 샀는데, 러시아와 비슷한 분위기로 꾸미고 러시아 요리사를 두었다. 2번은 약간 센티멘털한 분위기고, 3번은 광활한 대지에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연주자로서 매번 무대에서 심판받는 게 힘들지 않은가.

"젊을 때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한 부담이 컸다. 지금도 물론 연주에 대한 책임감은 크지만 내 연주를 즐기러 오는 관객들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마지막까지 연주하고 싶은 단 하나의 소나타만 꼽으라면.

"(단호하게) 고를 수 없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가 있고, 리스트의 유일한 소나타도 완벽한 작품이다. 베토벤 소나타 29번 '해머 클라비어'는 정복하기 힘든 기가 막힌 작품이다."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13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14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