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퍼진 癌도 어쩌지 못했다 가슴속 피아니스트의 魂은…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0.10.28 03:03

유방암 이겨내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 낸 서혜경
오른팔 못 쓴다는 경고까지… 음표 잊을까 한때 마취 거부 "히말라야 14좌 완등한 기분"

"항암 수술받고 사흘 만에 퇴원하자마자 '호프만의 뱃노래'를 쳤어요. 가슴은 물론 오른쪽 겨드랑이까지 잘라냈는데, 파도 물결과 바람 소리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이 곡을 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더라고요. 난 아직 '피아니스트 서혜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50)은 인터뷰 내내 쾌활했다. 3년 전 암 수술과 치료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진단까지 이겨낸 자신이 대견스러운 듯했다.

서혜경(왼쪽)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함께 녹음한 지휘자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 제공
2007년 4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재기한 서혜경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까지 수록한 음반(CD 3장)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냈다. 지휘자 알렉산더 드리트리예프(75)가 이끄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믹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드미트리예프는 라흐마니노프 해석으로 이름 높다.

"라흐마니노프 2번은 작곡가가 1번 교향곡이 참패한 뒤 좌절에 빠져 있다가 재기한 곡이잖아요. 암 수술을 받고 일어선 저에겐 의미가 남다른 작품입니다." 서혜경은 "열일곱 살 때 나고야에서 2번과 베토벤 협주곡 '황제'를 한 콘서트에서 연주했고, 지난 35년간 200번쯤은 쳤을 것"이라고 했다. "여성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 음반을 낸 것은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테크닉과 힘을 요구하는 작품이라 특히 힘들었어요." 그는 "라흐마니노프 전곡 녹음은 등반가들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하는 것 같은 도전"이라고 했다.

서혜경은 3번 협주곡을 '코끼리 협주곡'이라고 불렀다. "영화 '샤인' 주인공이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하다가 정신착란에 걸려요. 피아니스트가 정신이 이상해질 만큼 음표가 복잡하고 치기 힘들어요."

40대 중반에 맞닥뜨린 암과의 싸움은 서혜경의 삶을 나누는 분수령이었다. "암 치료를 하면 3~5년 정도 피아노를 못 친다고 하더군요. 오른손을 못 쓸 수도 있다고 해서 앞으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만 쳐야 하나 싶었고요. 수술 때는 머릿속에 든 수많은 음표를 잊어버릴까봐 전신마취를 안 하려고 버티기도 했습니다."

2008년 1월 암 수술 후 가진 첫 복귀 무대에서 서혜경이 택한 곡도 라흐마니노프 2번과 3번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그는 라흐마니노프 2·3번을 한 무대에서 연주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지난 7월 열흘 일정으로 모스크바에서 녹음에 들어갔을 때도 쉽지 않았다. "1번과 2번 1악장 녹음을 마치고 사흘째 되던 날, 손가락은 움직이는데 근육통 때문에 손을 들어올릴 수 없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녹음을 마쳤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서혜경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슈베르트 가곡을 편곡한 '밤과 꿈', 슈만이 아내 클라라에게 바친 '헌정'을 들려줬다. 2008년에 낸 재기 앨범 '밤과 꿈'의 처음과 마지막에 수록된 곡이다. "수술을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마지막 선물이나 남겨주려고 했던 음반입니다. 슈베르트와 슈만, 쇼팽, 멘델스존 자장가가 들어 있거든요." 연주는 이번 앨범에 수록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8번째 변주로 이어졌다. 인생의 고비를 넘긴 서혜경의 피아노 소리가 더욱 힘차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