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기다림의 끝… 라두 루푸 리사이틀

  • 성남문화재단
  • 글=노태헌(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 2010.10.27 10:03

리흐테르는 자신이 연주자로서 다양성을 모색하기 위해 경력 초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 새로운 레퍼토리를 축적해왔다고 브뤼노 몽생종과의 대담에서 밝힌바 있다. 이와 같은 레퍼토리의 확장은 연주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일종의 도전이자 자극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처럼 전방위적인 시도를 감행하는 연주자가 있는 반면 자신의 영역을 한없이 수렴해나가는 연주자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연주자가 노년에 이르면 많은 정보량을 담고 있는 서사적인 스타일로 인해 템포는 더 느려지고 자신의 어법을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압축적인 레퍼토리로 서서히 변모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라두 루푸는 그렇게 변해간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이라는 반경을 고집스럽게 유지해온 것이다.

1945년 루마니아 갈라츠에서 태어난 루푸는 196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리흐테르와 길렐스를 길러낸 겐리크 네이가우스 그리고 그의 아들이었던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루푸는 1966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기점으로 1967년 조르주 에네스쿠 콩쿠르, 1969년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음악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서서히 알리기 시작했다.

카라얀, 줄리니, 오자와, 바렌보임 같은 주요 지휘자들과 협연을 마친 그는 데카와 계약해 자신의 압축적인 예술관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1970년~1980년대의 데카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자리매김한 그는 히피족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한 헤어스타일을 표지로 주옥같은 연주들을 엄선하여 녹음했는데, 대부분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브람스, 슈만 같은 정통 독일 레퍼토리에서 그의 순정한 피아니즘을 표출했다. 또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의 두 번의 협연(모차르트, 슈베르트 소나타), 그리고 정경화의 프랑크, 드뷔시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돌연 반주자로 나타나 지극히 제한된 모습과는 달리 국내 팬들에게도 그 이름을 많이 알리기도 했다.

투박한 무대 매너와 일체의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는 루푸의 괴벽에 가까운 행보는 그의 은자적인 풍모를 더욱 굳건히 했고, 그를 직접 만나보고자 하는 팬들의 관심 역시 엄청나게 증폭되었다. 물론 그의 음악 외적인 성향보다는 서정적인 시정이 담뿍 담긴 피아니즘을 보려는 욕구가 더 컸겠지만 말이다.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다는 그의 전모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이달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물론 아직 한국을 찾지 않은 대가들은 많이 있지만 극도로 제한된 행보를 보이는 루푸가 찾아온다는 것은 국내 음악계에 일어난 사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루푸는 최근 10년 사이 새 녹음을 발매한 적이 없어 애호가들의 갈증이 큰 데다 이번 연주 프로그램은 야나체크의 '안개 속에서', 베토벤의 23번 소나타 ‘열정’과 더불어 그의 피아니즘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D960이라는 눈부신 구성이다.

루푸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 총 9개의 작품을 녹음했는데 특히 그의 D960은 수많은 동종 연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연으로 알려져 있다. 음반에서나마 곱씹어보는 그만의 방식은 투명함과 섬세함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해볼 수 있다. 전체 작품의 텍스처를 투명하게 조형하고 세부 멜로디에 다양한 색채를 부여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반복적인 구조에도 만화경 같은 매력을 부과했다. 그의 해석 전반에는 일렁이는 다이내믹 레인지의 분포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체 선율미를 드러내는 방식과 순간의 여백에 방점을 찍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존재한다. 서정적인 루푸 스타일의 새로운 척도를 열어낸 셈이다.

루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분명히 목도하면서도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 현상처럼 무대 한편에서 여운과 울림으로 일관된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낼 것이다. 지난 2008년 고별 연주회를 끝으로 홀연히 무대를 떠났던 알프레트 브렌델처럼 우리는 언제 또다시 이 기약 없는 예술가를 맞대면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일시 : 10월 31일 20시
장소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문의 : 02-541-6234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