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의 머릿속을 들춰볼까

  • 손정미 기자

입력 : 2010.09.28 03:16

작품 아이디어 담은 드로잉展… "내 예술의 뿌리이자 지도"

"아침에 깨어나면 커피를 들고 드로잉룸에 갑니다. 전날 붙인 작품 드로잉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고칠 건 고쳐요. 드로잉은 제 작품의 뿌리이자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만난 설치미술가 이불은 자신의 드로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는 이불의 드로잉과 입체작품이 전시 중이다. 2004년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아이디어 드로잉이다. 작품의 이미지부터 재질은 뭐로 할지,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지 세세하게 적혀 있다. 전시된 드로잉 180여점 가운데는 2007년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에서 보였던 전시 〈모든 새로운 그늘〉의 드로잉들이 포함됐다. 작품 〈Heaven and Earth〉〈Excavation〉 등의 드로잉이다.

입체작품〈Sternbau〉앞에 선 이불.
드로잉 중 상당수는 작품으로 육화(肉化)됐지만 일부는 실현되지 못해 아이디어로만 남은 것들도 있다. 이불은 "이번 전시를 위해 그동안 서랍에 들어 있던 드로잉을 꺼내보면서 '내가 이 작품을 왜 안 만들었지?' 하면서 다시 만들고 싶은 작품도 있다"고 말했다. 이불의 드로잉은 작가의 상상력과 치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자신의 작품과 드로잉의 완결성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이불은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인 백남준 이후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이다. 1997년 뉴욕 모마(MoMA)에서 전시를 가졌고,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한국관 대표이면서 동시에 본전시에 초청돼 특별상을 받았다.

이불의 드로잉전에 나온〈무제(스킨 텍스처)〉(2009). 이불은 드로잉을 통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작가는“일기를 쓰듯 매일 작품 드로잉을 한다”고 말했다. /PKM 트리니티 갤러리 제공
2000년 이후 이불의 작품은 실현되지 못한 이상, 즉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보여왔다. 이번 전시에 드로잉과 함께 나온 입체작품 〈Sternbau〉는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1880~1938)가 꿈꿨던 공중에 떠 있는 눈부신 수정도시에 대한 오마주이다. 유리와 크리스털·철·알루미늄으로 만든 작품으로 우리말로 바꾸면 '별이 된 빌딩'이다. 아름답고 화려해 보이지만 철거됐거나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추함과 위험을 암시하는 날카로움이 공존한다. 유토피아의 아름다움과 추함, 평화와 위협을 말하고 있다.〈Sternbau〉를 위한 드로잉도 나와 있어 실제 작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불의 팬이라면 드로잉을 통해 실제 입체 작품을 떠올리는 묘미를 즐길 수 있고 실현되지 않은 작품 드로잉에서는 자신만의 상상을 펼쳐볼 수 있다.

이불은 "요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여기 전시된 드로잉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2009년 9월 9일이라고 적힌 드로잉에는 푸른 개가 등장했다. 푸른 개 옆에 '흑경(黑鏡). 늙은 얼굴'과 같은 메모와 함께 사용할 재료와 기술이 적혀 있다. 작가에게 앞으로 발표할 작품은 1급 비밀인데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처음엔 드로잉 전시 자체를 망설였지만 과거 작품이 지나온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나를 너무 드러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불은 2011년 가을 일본 모리미술관에서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열 계획이며 전시에 앞서 드로잉만 모은 책을 낼 예정이다. 드로잉 전시는 10월 15일까지 열린다. (02)515-9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