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60분짜리 인생 드라마… 아픔·후회가 요동친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0.09.27 03:16

1인극 '크라프의 마지막…'

엄청난 데시벨의 천둥소리와 함께 카메라 조리개 같은 검은 막이 열렸다. 어두운 공간에 70세 노인 크라프(로버트 윌슨)가 붙박이듯 앉아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침묵을 깨며 빗방울 소리가 들어온다. 무대에 빗줄기처럼 조명이 떨어진다. 3~4분쯤 뒤 크라프는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서랍을 열거나 바나나 껍질을 까는 움직임은 느리고 양식화돼 있었다. 손에 든 바나나를 입에 넣기까지 무려 30초가 걸렸다.

연극‘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무대에 선 로버트 윌슨.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제공

이미지 연극의 거장 로버트 윌슨이 연출하고 직접 출연한 1인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는 다른 시·공간으로 관객을 데려갔다. 시간과 동작, 조명과 소리는 치밀하게 계산돼 있었다. 크라프가 매년 해왔듯 지난 1년에 대한 녹음을 준비하다 30년 전 테이프에 담긴 자신의 음성기록을 듣는다는 설정은 단순하다. 하지만 윌슨은 빛과 어둠, 소음과 침묵으로 연극성을 극대화했다. 조명은 갓 태어난 세포처럼 배우의 동작에 감응했고, 천장을 뚫을 기세로 내리치던 비는 크라프가 문제의 테이프를 떨어뜨리는 순간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재생된 녹음에서 30년 전의 크라프는 "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게 좋다. 어두우니 덜 외롭다"고 속삭인다. 이어 한 여자 이야기가 나오자 크라프는 괴로워한다. 그는 "나는 모로 누워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손은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정적(靜寂)은 처음이었다"는 대목을 반복 재생한다. 통증과 후회가 격하게 요동친다. 크라프는 새 테이프를 꺼내 녹음을 시작한다.

인생의 드라마는 60분짜리 짧은 실험극에도 담길 수 있었다. 천둥과 번개, 암실(暗室) 같은 무대, 진실을 폭로하는 테이프, 술 따르는 소리, 조롱과 탄식으로 속을 채운 이 연극은 감동은 없었지만 형식이 강렬했다. "빛은 어둠을 더 어둡게, 어둠은 빛을 더 빛나게 만든다"는 윌슨의 철학이 즉물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지난 2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시작된 제5회 연극올림픽의 개막작이었다. 11월 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대회는 13개국 연극 48편이 공연된다. 일정은 www.theatreolympics.or.kr 참조. (02)747-2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