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데생 땐 도화지 집어던질 만큼 열정적"

  • 서귀포=손정미 기자
  • 오재용 기자

입력 : 2010.09.08 00:37

서귀포 13회 이중섭 세미나 '꿈꾸는 노마드展' 함께 열려

태풍 말로가 비껴간 7일 오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서는 한국 근대 회화를 대표하는 이중섭(李仲燮·1916~1956) 화백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2010 이중섭 세미나'가 열렸다.

올해로 13회를 맞이하는 이중섭 세미나는 전문가와 일반인이 함께 모여 이 화백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위대한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예술혼이 짙게 남아 있는 서귀포에서 열리고 있다. 이 화백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서귀포로 옮겨와 1년간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고, 이곳에서 '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와 아이들' 같은 걸작을 남겼다.

7일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에서 이중섭 세미나 참가자들이 이 화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 화백의 조카인 이영진씨, 제1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인 황용엽 화백, 이중섭 미술상 운영위원인 최경한₩임영방₩이종상씨, 김정락 방송통신대 교수. /서귀포=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서귀포시와 조선일보사의 공동주최로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린 이번 이중섭 세미나에서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중섭 화백이 활동하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한국 미술은 광복과 좌우 이념의 대립, 6·25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으며, 이 화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류 학예연구사는 "1950~60년대는 한국 미술에서 정신사적인 이론과 배경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면서 "한국 근현대 미술가들에게 '소'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서 중요한 소재였다"고 말했다.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1947년 한국 미술의 현대성을 이룩하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으로 김환기 등이 주축이 된 신사실파가 결성됐으며, 이들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순수한 예술성을 찾으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중섭 화백은 1953년 이 미술운동에 참여했고, 이들의 노력은 한국 추상미술의 성립에 대들보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날 이중섭 세미나에는 이중섭 미술상 운영위원인 임영방·최경한·이종상·유희영씨, 이중섭 미술상 1회 수상자인 황용엽 화백, 이중섭 화백의 조카 이영진씨, 고창후 서귀포시장, 부현일 제주도립미술관장, 김병수 서귀포문화원장, 이연심 한국 예총 서귀포지부장, 이중섭 미술관 운영위원인 이왈종·고영우·현중언씨, 박명자 갤러리현대 사장, 이중섭 미술상 운영위원장인 김문순 조선일보사 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한편 서귀포시 서귀동에 자리 잡은 이중섭 미술관은 이번 세미나에 맞춰 7일부터 특별기획전 '꿈꾸는 노마드-섬의 시간'을 개막했다. 고권·오승용·이두원·한승영·허문희 등 제주도가 고향이거나 이중섭 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청년작가 5명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 5월 29일에는 이중섭 화백이 졸업한 일본 문화학원 동창회 관계자 6명이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이 화백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겨 미술 공부를 계속했다. 문화학원 동창회는 이 화백의 동기생이었던 이시이 유타카 화백이 재학 당시 이중섭 화백을 기억하는 이야기를 담은 녹음테이프를 이중섭 미술관에 전달했다. 이시이 화백은 이 녹음테이프에서 "평소에는 유순한 이중섭이 데생 시간이면 도화지를 구겨 창밖으로 집어던질 만큼 작품에 열심이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