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I] [눈 길 끄는 행사] 천재 백남준의 예술혼을 더듬어보자

  • 김진명 기자

입력 : 2010.09.06 22:52

[눈 길 끄는 행사] 백남준아트센터의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
"너무 앞서서 난해한 인물" 남들과 다른 시선 드러나
숫자 13도 그에겐 행운이 외국의 '파격작품'도 전시

1950년 열여덟 살 난 소년 백남준은 한국을 떠났다. 일본에서, 독일에서, 미국에서 예술을 했다. 피아노를 때려부수고 관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다.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린 텔레비전 13대를 늘어놓고 전시회라고 불렀다. 옷 벗은 여성 예술가 샬로트 무어만과 퍼포먼스를 벌였다. 엄청난 빚을 내가며 대중스타와 예술가를 끌어모아 대륙과 대륙을 잇는 생방송을 했다.

그러다가 귀국한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반세기쯤 예술을 하며 '비디오 아티스트'란 말을 만들어 놓고 2006년 백남준은 숨졌다. 한국인 예술가로서 그토록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이 많지도 않건만 아직도 한국의 대중은 얼떨떨하다. 그가 유명한 줄은 알아도 왜 유명한지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어서다.

세월을 앞서간 이 예술가의 세계에 '입문'하는 데 아주 유용한 곳이 있다.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지난달 말부터 여기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백남준 작품과 다른 현대작가 12명의 작품을 모아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는 전시회로 엮었다. 아트센터 1층과 2층 공간을 완전히 재배치했는데, 솔직히 이걸 본다고 백남준을 알게 된다는 법은 전혀 없다. 그래도 지난 2일 일단 한 번 돌아봤다.

백남준 작품인‘TV 부처’가 백남준아트센터 2층 특별전시장에 놓여 있다. 폐쇄회로시스템을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카메라가 부처상을 실시간 촬영해 텔레비전으로 내보내면 부처는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조한다. /김진명 기자 geumbori@chosun.com
비디오 신디사이저와 벽암록

2일 오전 백남준아트센터 1층에 들어섰다. 좁은 로비에 뜬금 없이 자동차 1대가 서 있다. 못된 동네애들이 라커를 뿌린 듯 은색 칠을 뒤집어 쓰고 있다. 그 뒤쪽 기다란 수족관에선 금붕어 같은 물고기들이 노닥거린다. 잘 보면 물고기 뒤편엔 텔레비전 여러 대가 늘어서 있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선 달라붙은 옷을 입은 어떤 남성이 평이한 무용 동작을 반복한다.

얼떨떨한가? 그렇다면 좋은 시작이다. 이건 전부 백남준 작품이다. 은색 자동차는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란 작품 일부고, 수족관은 '비디오 물고기'란 작품이다. 수족관 뒤 텔레비전에서 춤추는 남자는 현대무용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머스 커닝햄(Cunningham). 안내를 맡은 이수영 큐레이터가 "테크놀로지·자연·사람이 공생하는 철학을 담은 작품으로 작품 속에서 커닝햄은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동작을 선보여 기존 무용의 개념을 깨고 있다"고 설명했다.

1층을 차지한 것은 대부분 백남준이 만든 작품이다. 백남준 초심자라면 '참여TV'·'자석TV'와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찾아봐야 한다. 1960년대부터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본 백남준이 시대를 얼마나 앞서갔는지, 비디오 아티스트란 이름을 어떻게 얻었는지 아는 데 기본이 된다.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일방적 송신에 반발해 관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텔레비전 화면에 자석을 가져가면서 색색으로 변하는 무늬를 살펴보도록 시도했다. "텔레비전에 자석을 갖다대면 아름다운 무늬가 생긴다는 건 어떤 기술자든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로 예술적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달리 없었죠."

백남준은 원하는 비디오 이미지를 얻기 위해 직접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했다. 전시장에선 카메라에 대고 말을 하면 그 음성신호를 시각 정보로 바꿔 텔레비전 화면에 비쳐주는 오디오 제네레이터도 볼 수 있다. 이영철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이 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기억하면서 둘러보면 뭔가 좀 와닿을 것도 같다. "백남준은 자신이 나타내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수단을 발견, 동시에 발명한 사람입니다. 마치 붓이 없는 세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처음 붓을 개발한 어떤 사람처럼. 그건 대단한 거죠."

선(禪)적 세계를 담은 '블루 부다'란 작품 맞은편에 전시한 '벽암록 필사본'도 흥미를 일으킨다. 백남준이 직접 손으로 벽암록 구절을 써넣은 종이를 걸어뒀는데, 이미 세상 뜬 예술가의 글씨를 하나 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묘한 감상이 든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더 알고 싶어진다.

닭 굽는 냄새와 1000원 지폐

특별전시장 2층으로 올라가면 어디선가 고소하면서도 좀 느끼한 냄새가 풍겨온다. "혹시 닭 굽는 냄새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유진 큐레이터가 "전시장에서 나는 닭 튀기는 냄새는 바로 싱가포르 작가인 림 차이 추엔(Lim Tzay Chuen)의 작품"이라며 말했다. 이 닭 냄새엔 정식 작품 제목도 붙어 있다. '핑거 리킹 굿'(Finger Licking Good), 손가락까지 쫄쫄 빨아먹을 만큼 맛있다는 뜻이다. '냄새 전시'를 위해 전시장 한쪽에 관객이 볼 수 없도록 조리 공간을 만들어 계속 닭을 튀기고 있단다. 예술적으로 설명하자면 '감상자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경험하도록 추궁하고 지각을 재평가하고 미학적 경험에 대한 전제들에 의문점을 갖도록 하려는 림 차이 추엔 특유의 시도'다. 일상적으로 말하자면 "왜 미술관에서 닭 냄새가 나면 안 되냐?"는 얘기지만.

백남준아트센터가 이번 특별전 이름을 루이스 하이드(Hyde)의 책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Trickster Makes This World)에서 따온 데는 이유가 있다. 트릭스터는 옛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난꾸러기, 우리가 쉽게 아는 예를 들자면 '서유기'의 '손오공'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이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을 위반하는 속임수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 간 경계를 허물고 소통을 끌어내며, 그건 바로 백남준 같은 예술가들이 지닌 속성이기도 하다.

트릭스터로 인정받아 초청된 예술가는 백남준을 제외하고 12명이다. 터키 예술가인 아멧 오구(Ogut)는 주차 중인 자동차에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종이를 더덕더덕 붙여 택시나 경찰차로 둔갑시키는 과정을 담은 '다른 사람의 자동차'란 작품을 내놓았다. 이탈리아 출신인 지아니 모티(Motti)는 미술관이 지급한 작품 제작비 800만원을 모두 1000원짜리 현금으로 바꿔 전시장 바닥에 뿌려놓았다. 한국에선 주재환·김범 작가가 참여했고, 티베트 출신 스위스 예술가인 키상 램다크(Lamdark)는 '쓸모 없는 조각들'(Useless Sculptures)이란 작품을 출품했다.

특별전에 참가한 예술가가 백남준을 포함해 전체 13명이란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백남준은 1963년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이란 전시에 텔레비전 13대를 내놓았다. '서양인들은 싫어하는 수지만 백남준에겐 행운의 수'(이용우,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로 풀이되는 13을 일부러 맞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