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를 사랑한 '슛돌이'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0.08.26 02:57 | 수정 : 2010.08.26 07:32

국내외 콩쿠르 '4관왕'… 축구선수 출신 발레리노 김명규
하늘로 솟구치는 점프 압권 "골 넣었을 때 상상하며 뛰어"
서양 무용수들 "한국서 온 짐승"

독일 베를린콩쿠르 그랑프리, 동아무용콩쿠르 그랑프리, 이탈리아 로마콩쿠르 금상, 불가리아 바르나콩쿠르 금상…. 발레리노 김명규(22·한국예술종합학교 4년)의 올해 성적표는 '1등 릴레이'다. 국내외 4개 발레콩쿠르에 출전해 최고상을 놓치지 않은 그는 "도전해 보자는 생각으로 긴장 풀고 춤을 췄는데 운이 따랐다. 내년엔 어떡하나, 불안할 정도"라며 웃었다.

지난달 29일 바르나콩쿠르에서 최종 3라운드까지 경연을 마치고 거리에 나온 김명규는 파란색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등을 돌리자 숫자 11과 드록바(Drogba)라는 이름이 보였다. 드록바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간판 공격수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였다는 김명규는 "하루에 네 게임을 뛰기도 했는데 그렇게 다져진 체력과 근육이 발레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였던 발레리노 김명규가 드록바 유니폼을 입고 발레 포즈를 취했다. 그는“축구를 계속 했다면 지금쯤 박지성 형과 같이 뛰고 있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국제콩쿠르에서 함께 경쟁한 서양 무용수들은 김명규에게 '코리안 비스트(Korean beast·한국에서 온 짐승)'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높고 체공시간이 긴 점프 때문이다. 공중으로 솟구칠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를 받았던 이 발레리노는 "콩쿠르에서 남자 무용수가 제일 먼저 보여주는 기술이 점프"라면서 "골을 넣었다고 상상하면서 점프를 하면 힘도 안 든다"고 했다.

전북 전주 출신인 김명규는 중학생 시절 유소년 축구대표팀에 선발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못 넣고 호되게 벌받는 장면을 어머니가 목격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 "명규야, 무용 해볼래?"

그는 전주예고 무용과에 진학했고, 무용 중에서도 스포츠댄스에 끌렸다. "발레는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츠를 입어야 해서, 한국무용은 지루하고 느려서, 현대무용은 도통 모르겠어서 싫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교 1학년 때 무용콩쿠르 구경을 갔다 발레에 중독되고 말았다. 김명규는 "황홀했다.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바르나콩쿠르에서 보여준 점프 장면. /김명규 제공
발레를 배운 지 7년 만에 그는 이원국·김용걸·김현웅을 잇는 한국 발레리노의 기대주로 성장했다. 178㎝, 65㎏인 김명규는 팔다리가 길지도 않고 '왕자급' 외모도 아니다. 하지만 좋은 춤은 신체 조건을 이긴다. "관객은 몸이 아니라 춤에 빠져드는 거잖아요. 키와 몸매 때문에 힘들어할 때 선생님이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도 170㎝밖에 안 됐다'며 격려해 주셨어요."

김명규는 26~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발레 '돈키호테'를 공연한다. 오는 11월부터는 박세은(바르나에서 함께 금상 수상)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발레단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 70개 도시를 돌며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미국 워싱턴발레단 등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는 이 발레리노는 "영국 로열발레단이나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춤추고 싶은 꿈이 있지만 일단은 국내 발레단에서 기본기와 경험을 더 쌓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게 '발레에서 가장 값진 게 뭐냐'고 물었다.

"박수요. 직업 발레리노가 돼도 봉급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 관객의 박수에 중독돼 더 나은 춤을 추게 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