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만난 피아노… 음악과 전쟁이 시작됐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8.25 23:22

연주회 여는 '한국 피아노 代母' 이경숙
"피란지에서 처음 건반 두드려… 유학 후엔 '全曲 연주' 레이스
임동민·김선욱·손열음… '무서운 아이들' 경탄스럽죠"

60년 전의 전쟁은 여섯 살 소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국 피아노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이경숙(66·전 연세대 음대 학장)은 6·25 전쟁 통에 처음 피아노를 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피란을 떠났던 부산의 셋방에 다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들여놓았다. "아마도 선교사가 남기고 간 악기였나 봐요. 성악을 하셨던 어머니를 따라서 띄엄띄엄 악보를 읽어갔어요." 이화여중을 마치고 서울예고 1학년 때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경숙은 줄리아드 음대와 커티스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연세대 음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이경숙은 1987년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5곡) 연주회를 시작으로 1988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1989년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19곡)과 1991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전곡(9곡)까지 숨 가쁘게 전곡(全曲) 연주 시리즈를 감행했다. 흡사 완주 레이스를 펼치는 마라토너 같은 그의 강행군에 "이경숙은 한국 음악계에 전문 연주자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계기가 됐다"(음악평론가 한상우)는 평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이경숙 자신은 "'무식(無識)이 약(藥)'이라고 얼마나 고된 길인지 알았다면 절대 손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앞둔 피아니스트 이경숙은“아침 5시반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안 되는 대목은 따로 노트를 만들어서 적어둔다”고 말했다. /크레디아 제공
한국 음악계에 '전곡 연주'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던 이경숙이 다시 모차르트로 복귀한다. 다음 달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다. 그는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이 다가가기 어렵고 두려운 존재라면,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항상 가깝게 지내온 벗"이라고 말했다.

"평생 부상을 모르고 지냈는데 독주회를 앞두고 갑자기 연습량을 늘리니 왼쪽 팔목에 근육 통증까지 오네요." 파스를 붙이고 나온 이경숙은 "한 번도 내 연주가 맘에 들었던 적은 없다. 35세에 세상을 떠난 천재 작곡가의 걸작을 두 배 가깝게 살면서 나는 평생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경숙은 세월이 흐르니 곡 하나에도 사람들의 얼굴이 포개진다고 했다. 모차르트 소나타 1번을 처음 배울 땐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곡이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첫 스승의 매서운 가르침이 떠오른다. 소나타 2번은 유려하면서도 감칠맛 나게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 소나타 8번은 언제나 노래하듯이 모차르트를 연주하라던 어머니의 음성이 겹쳐온다. 소나타 12번은 길게 땋은 머리로 말끔하게 건반에 다가갔던 피아니스트 신수정, 3번은 딸인 피아니스트 김규연의 곡이다.

피아니스트 임동민·동혁 형제와 김선욱, 딸 김규연과 손열음, 조성진까지 한국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약진과 급성장은 눈부시다. '대모' 이경숙은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이 놀랄 만큼 많은 성과를 거둔 '무서운 아이들'이 경탄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대에 한 번 서기 위해서 목 빠지게 기다려야 했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이 손쉽게 찾아온다. 원하는 대로 음악이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넘어질 때에도 딛고 일어서야 비로소 그만큼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숙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 9월 14·15·17일 오후 8시, 18일 오후 5시 호암아트홀, (02)751-9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