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나무 그루터기에서 천년 전 연가를 들었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0.07.29 03:05

극작가 배삼식, '피맛골 연가' 등 연극·뮤지컬 네 편 잇따라 무대에

"지난해 서울 종로1가 피맛골에 아직 열차집이 남아 있을 때였어요. 재개발 공사 현장을 지나는데 몸통은 잘리고 밑동만 남은 나무가 보여요. 실핏줄처럼 퍼진 그 골목길에서 혹시 저 나무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극작가 배삼식(40)은 느릿한 말투로 기억을 더듬었다. 오는 9월 개막하는 뮤지컬 '피맛골 연가'(배삼식 작·유희성 연출)의 이야기는 그 골목길과 나무 그루터기에서 뻗어나왔다.

"봄에 먼저 피는 살구꽃 아래서 사랑이 피어날 수도 있겠지요. 꽃그늘은 현실에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를 보면 이승 사람과 저승 귀신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여럿 나옵니다. 시(詩)로 화답하는 장면이 참 좋지요."

‘하얀 앵두’‘피맛골 연가’등에서 나무를 소재로 쓴 극작가 배삼식은“자연의 긴 시간으로 보면 삶의 갈등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진기주 인턴기자(중앙대 4년)
조선시대 피맛골을 배경으로 김생(박은태)과 홍랑(조정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피맛골 연가'는 살구나무 혼령 행매(양희경)의 노래로 열리고 닫힌다. "한 천 년 기다려 보면 오시려나/ 저 골목 돌아서 떠나간 사람~"으로 흐르는 '한 천 년', 김생과 홍랑이 부르는 '아침은 오지 않으리' 등 노랫말은 서정시 같다.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작가로도 알려진 배삼식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바쁜 극작가다. 8~9월 서울에서만 그가 쓴 연극·뮤지컬 4편이 공연된다. 지난해 초연해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을 차지한 '하얀 앵두'(연출 김동현), '지하철 1호선'의 김민기가 연출하는 뮤지컬 '도도', 김성녀의 1인극 '벽 속의 요정'(연출 손진책) 등이다.

배삼식은 동·식물을 종종 소재로 쓴다. '하얀 앵두'는 강원도 영월로 내려온 작가 아산(조영진)의 개[犬] 원백이가 동네 노인 지복(박수영)의 암캐 복순이와 짝짓기를 하는 희극적 상황으로 출발한다. 인물들은 모두 상처 또는 결핍 투성이지만 싸우고 비틀거리다가도 나무를 심고 물을 뿌린다. 배삼식은 "희망이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작품"이라며 "삶에서 겪는 직선적 갈등들도 억만 겁 시간 앞에서 보면 초라하게 구부러진다"고 말했다.

이번에 초연되는 뮤지컬 '도도'는 도도하고 부족한 것 없이 살던 개 한 마리가 버림받은 뒤 동반자를 찾아 나서는 드라마다. 동화가 원작으로, 유재하가요제 대상을 받았던 고찬용이 작곡했다.

렌즈가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이 극작가는 우화(寓話)적인 형식으로 이야기를 뽑아낸다. 2007년 동아연극상 대상을 받은 '열하일기만보'도 말을 하는 네발짐승을 통해 무기력한 지식인을 풍자했다. 일각에서는 '관념적이고 극적 갈등이 약한 작가'라는 지적도 있지만, 배삼식은 "연극이 새로운 물음이나 생각을 담고 있지 않다면 내겐 무망하고 지루할 뿐"이라고 했다.

"연극의 목적이 갈등 자체는 아니잖아요. 제겐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중요해요. 그래서 형식적으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쓰려고 애씁니다. 가장 두려운 건 자기복제, 동어반복이지요."

▶'하얀 앵두'는 8월 4~29일 두산아트센터. '피맛골 연가'는 9월 4~14일 세종문화회관. '도도'는 9월 25일부터 학전블루.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