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7.20 14:03
"단체생활 행복…꼭 옥주현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경험만한 배짱은 없다.
프로 무대에서 날고 긴다는 축구선수들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선 몸과 공이 따로 논다. 극도의 긴장과 흥분 때문이다. 요즘 아이비도 그런 A매치(국가대표 간 경기)의 긴장감을 매일 느낀다. 2005년 가수 데뷔 이후 뮤지컬 무대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비가 고른 뮤지컬 데뷔 작품은 '키스 미, 케이트'. 셰익스피어의 희극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극중극 형태로 삽입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아이비는 애교 100단의 눈웃음으로 뭇 남성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로아 레인 역을 맡았다. 공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분장실과 의장실을 바삐 오가는 아이비의 뒤를 쫓았다.
아이비는 인터뷰 내내 '행복'과 '감사'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공연을 앞둔 아이비의 들뜬 표정 속에서 그 이유를 읽어내릴 수 있었다.
▶눈위의 바퀴벌레-손등엔 커닝페이퍼
오후 6시 서울 국립극장 무대 뒤 배우 분장실. 공연 시작 2시간 전이다. 무대에선 코러스들이 노래를 맞추고 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분주히 복도를 오간다.
아이비는 오후 5시쯤 극장에 와서 목과 몸을 풀고 6시부터 분장을 시작한다. 분장은 15분이면 끝난다. 아이비는 눈에 붙인 속눈썹을 일명 '바퀴벌레 속눈썹'이라고 불렀다. "저도 이렇게 긴 속눈썹은 처음 해봤어요. 근데 이렇게 긴 건 붙여도 무대에선 잘 안 보여요."
아이비가 왼쪽 손등을 보여준다. 희미한 글씨 자국이 남아있다. "가사 콤플렉스가 있어요. 2막에 솔로곡이 있는데 중요한 가사 몇개를 여기 써놓곤 해요. 커닝페이퍼죠. 써놓으면 심적인 안정이 돼요. 다행히 아직까지 가사를 까먹은 적은 없어요."
극중 마피아 조직의 악당2 역을 맡은 배우 이훈진이 분장실을 기웃거린다. 동료 배우로서 아이비를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비라기 보다 그냥 (박)은혜(아이비의 본명) 같아요. 가수들과 작업할 땐 이질감이 있는데 은혜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어요." 듣고 있던 아이비가 "뭐야 멘트 준비한 거야?"라며 웃는다.
▶키스 미, 케이트? 키스 미, 아이비!
메이크업은 오후 6시20분쯤 끝났다. 가발을 쓸 차례다. 30여개의 가발이 분장실 한쪽 벽에 진열돼 있다. 각 가발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아이비의 가발이 없길래 물어보니 '박은혜'라고 적혀 있단다. 가발을 머리에 고정하기 위해 실핀 수십개가 동원됐다.
극중 상대역인 빌 칼룬(하지승)과의 키스신에 대해 물어봤다. "연습할 때는 볼에만 살짝 했고 진짜로 한 건 첫 공연 무대가 처음이었어요. 이젠 자주 하니까 아무렇지 않아요."
가수 데뷔 후 첫 키스신의 추억을 물었다. "1집 뮤직비디오에서 릭윤의 동생 칼윤과 함께 키스신을 찍었어요.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이긴 하지만, 사실상 미국 문화에 길들여진 분이잖아요. 상당히 색다른 경험이었어요.(웃음) 촬영장에 있던 매니저분이 보다가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오후 6시55분 마이크를 차기 위해 무대 뒷 공간으로 갔다. 가발과 마찬가지로 전 출연진의 마이크가 책상 위에 정돈돼 있다.
"방송할 때는 '인-이어(in-ear)'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이어폰을 귀에 꼽았는데, 무대에선 감에 의지해서 불러야 하니까 제 목소리가 잘 안들릴 때가 있어요."
▶노래와 무대의 소중함
지난해 11월 2년간의 공백을 딛고 컴백 앨범을 냈다. 스스로 많은 변화를 느꼈다. "예전엔 1등이라는 목표를 위해 살았는데 막상 1등을 해도 희열이 없었어요. 허무했죠. 즐기지 못하고 대중의 평가에 연연하니까 스트레스도 컸어요. 이젠 인기나 순위보다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해요."
지난 2007년이었다. 전 남자친구와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데뷔 이후 쌓아왔던 이미지와 인기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 "당시 루머와 구설수 때문에 힘들었지만 오히려 이젠 '잘 된 일이었구나,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구나' 생각해요. '내가 더 잃을 게 뭔가' 싶었어요. 이제는 노래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가수로서 더 잘된 일이라 생각해요."
4집 앨범에 대한 계획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밝은 느낌의 노래를 하고 싶어요. 발라드든 댄스든 장르는 상관 없고요. 최고가 되는 걸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은 1등보다 제 진심을 노래에 담아 부르고 누군가 제 노래를 사랑해준다면 그 또한 소중한 일이라 생각해요."
▶제2의 옥주현 꿈꿔요
아이비는 오후 7시20분 의상을 입으러 들어갔다. 배우 하지승에게 '뮤지컬 신인 배우 아이비에게 몇 점을 주겠냐'고 물었다. 하지승은 "첫 무대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막상 무대에 서니까 자신감 있게 잘하더라"며 "오히려 내가 (아이비에게) 배우는 부분도 있었다. 뮤지컬 무대를 도피처라 생각하고 오는 가수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선입견은 선입견일 뿐이었다. 100점 만점에 80점은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공연 시작 10분 전인 7시50분, 아이비를 비롯한 출연진 전체가 모였다. "오늘도 공연 좀 달려 볼까요"라는 이재은 연출의 선창에 맞춰 화이팅을 외쳤다.
"옥주현 언니가 왜 가수보다 뮤지컬배우로서의 활동 비율이 많아졌는지 이제 이해가 가요. 단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에너지를 얻어요. 재미있고 행복해요. '제2의 옥주현'이 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예요."
- Copyrights ⓒ 스포츠조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