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지각대장' 마에스트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7.15 03:07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Gergiev·사진)는 러시아의 '문화수도'로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오페라 극장을 1988년부터 20년 넘게 이끌고 있는 러시아의 '음악황제'입니다. 2007년부터는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도 겸임하고 있습니다.

"거의 매년 다른 지휘자의 2배나 되는 일정을 소화한다"는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리허설은 물론이고 때때로 연주회에도 늦는 '지각대장'이라는 점이지요. 1995년 글린카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실황 영상은 러시아에서 공연을 마친 게르기예프가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공연장으로 허겁지겁 들어가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지휘하는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로 담아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지각과 관련된 일화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15세쯤 고향 오세티야에서 지휘 스승이었던 아나톨리 브리스킨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공부하기로 했지만 그만 약속에 늦고 말았답니다. 그는 "10분쯤 지각을 하자 스승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지휘자가 되는 것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다'고 일러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국내에 소개된 게르기예프의 다큐멘터리 영상 제목도 '당신은 나 없이 시작할 수 없어(You cannot start without me)'입니다.

게르기예프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로 불리는 건 러시아 특유의 음악환경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음악과 행정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에선 예술감독의 역할이 막중한 것이지요. 그는 "러시아에서는 음반과 영상 기획부터 페스티벌 준비까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의 10배는 쏟아부어야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취임한 뒤 그의 음악적 행보에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작품에서는 당대 최고의 역량을 과시하지만 의욕적으로 진행했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는 혹평이 잇따랐지요. 숨 가쁜 일정이든, 음악 해석이든 러시아의 '음악 황제'는 현재 복잡한 기로 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