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7.06 22:19
[라이프 인 경기] 6·25특집 청소년 뮤지컬 만든 조경숙씨
34년의 연극활동 집대성 악성루머 훌훌 털고 재기 혼혈 가정 이야기 무대 올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아침부터 들러야 할 곳이 많아요"
지난 5일 오전 10시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소극장 마당' 앞. 승용차에서 서둘러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소극장 마당 조경숙(51) 대표의 발걸음이 빨랐다. 조 대표는 오는 12일부터 3일간 안양과 서울에서 자신이 이끌고 있는 색동예술단(청소년) 및 극단 창가(성인) 단원들과 박정기 극작가의 연출로 6·25전쟁 60주년 특집 창작 청소년 뮤지컬 '사랑과 미움'을 무대에 올린다. 전쟁 속에서 태어난 흑인 혼혈아와 다문화 가정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미래 시점으로 녹여낸 '사랑과 미움'은 6·25전쟁을 다룬 최초의 청소년 뮤지컬이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은 조 대표와 단원들이 작년 12월부터 준비해오고 있으며, 12일 안양아트센터에서 첫 막을 열게 된다.
지난 5일 오전 10시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소극장 마당' 앞. 승용차에서 서둘러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소극장 마당 조경숙(51) 대표의 발걸음이 빨랐다. 조 대표는 오는 12일부터 3일간 안양과 서울에서 자신이 이끌고 있는 색동예술단(청소년) 및 극단 창가(성인) 단원들과 박정기 극작가의 연출로 6·25전쟁 60주년 특집 창작 청소년 뮤지컬 '사랑과 미움'을 무대에 올린다. 전쟁 속에서 태어난 흑인 혼혈아와 다문화 가정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미래 시점으로 녹여낸 '사랑과 미움'은 6·25전쟁을 다룬 최초의 청소년 뮤지컬이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은 조 대표와 단원들이 작년 12월부터 준비해오고 있으며, 12일 안양아트센터에서 첫 막을 열게 된다.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한 연극
조 대표가 처음 연극을 접하게 된 것은 17살 때다. 당시 그녀는 낮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타일가게 일을 돕고, 밤에는 안양 근명여상(현 근명여자정보고) 야간반을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뒤 그녀는 어머니 가게에서 리어커를 끌고 짐 자전거를 몰며 타일 배달을 도맡아 했다. 힘든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우연히 벽에 붙어있는 연극 단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연극과 만나게 됐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탤런트나 영화배우의 꿈은 있었지만 생활이 어려워 말도 꺼내볼 수 없었다"며 "모집 포스터를 보니 연극을 하면 내 마음껏 소리도 치고 연기도 할 수 있어 삶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연극을 접한 뒤 그녀는 근명여상 은사인 모상담 교사의 도움으로 학교 연극반을 만들어 활동했고, 졸업 뒤에는 영화배우 최은희(84)씨가 서울에서 운영했던 '극단 배우'에 들어가 20살부터 2년간 연기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최 선생님은 납북돼 극단에 없었지만 그 분을 동경하며 꿈을 키울수 있었다"며 "지금도 우상이었던 최 선생님과 가끔 연락할 때면 20살 처녀처럼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20대 시절 여러 극단에서 활동하며 실력을 닦아온 그녀는 결혼 뒤 안양에 정착해 18년 전부터 지금의 소극장에서 극단을 이끌고 있다.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좌절과 극복
'어머니 아리랑'.
조 대표가 처음 쓴 작품 제목이다. 안양에서 극단 '창가'와 공연을 이어오던 그녀는 1990년대 초 저작권 심의가 강화되면서 창작극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당시 극단은 '품바'공연을 자주 무대에 올렸는데,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품바'를 쓴 고(故) 김시라 극작가를 찾아갔었다. 김 작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새 작품은 줄 수 없고, 대신 작품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한번도 작품을 써본 적이 없어 망설이자 김 작가께서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면 그게 작품이라고 했다"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타일가게를 운영했던 학창시절을 그대로 적어 내려가니 작품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첫 작품 '어머니 아리랑'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녀가 1999년 108개국이 참여하는 'NGO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공연할 수 있게 해줬다. 이때부터 지상파 방송국 공연 단장과 명지대 등 대학 강단에도 서며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2008년에는 자신이 직접 쓴 연극 '육영수'를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무대에 올리고, 직접 육 여사 어머니인 이경령 여사 역을 맡기도 했다. 이 연극은 육 여사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도 초청돼 700여명의 군민들 앞에서 공연됐다.
30년 고생 끝에 찾아온 성공의 순간 조 대표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작년 3월 1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있었던 삼일절 경축 행사에서 그녀는 색동예술단과 극단 창가 단원들이 함께 '3·1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이란 7분짜리 뮤지컬을 공연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8000여명의 관객 그리고 방송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시청자 앞에서의 공연은 그녀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대통령과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극단인 '창가'가 일본 극우단체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자금으로 운영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언론의 전화가 빗발쳤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악성댓글(악플)과 욕설이 난무했다.
그녀는 "잘못된 루머 하나로 30년 넘게 노력해 이룬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며 "내게 연기를 배우고 함께 공연했던 단원들과 아이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갈 때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잘못된 소문과 악플은 그녀를 6개월동안 기억상실증에 시달리게 했다. 색동예술단도 극단 창가 단원들도 모두 떠났지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안양 부흥고등학교에서 연극반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연을 하기로 결심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 참상을 일깨우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12일 1200명 관객 앞에서 청소년 뮤지컬 '사랑과 미움'을 선보이게 됐다.
그녀는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 꿈을 포기하지 않아 여기까지 왔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아이들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꿈꿀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 대표가 처음 연극을 접하게 된 것은 17살 때다. 당시 그녀는 낮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타일가게 일을 돕고, 밤에는 안양 근명여상(현 근명여자정보고) 야간반을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뒤 그녀는 어머니 가게에서 리어커를 끌고 짐 자전거를 몰며 타일 배달을 도맡아 했다. 힘든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우연히 벽에 붙어있는 연극 단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연극과 만나게 됐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탤런트나 영화배우의 꿈은 있었지만 생활이 어려워 말도 꺼내볼 수 없었다"며 "모집 포스터를 보니 연극을 하면 내 마음껏 소리도 치고 연기도 할 수 있어 삶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연극을 접한 뒤 그녀는 근명여상 은사인 모상담 교사의 도움으로 학교 연극반을 만들어 활동했고, 졸업 뒤에는 영화배우 최은희(84)씨가 서울에서 운영했던 '극단 배우'에 들어가 20살부터 2년간 연기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최 선생님은 납북돼 극단에 없었지만 그 분을 동경하며 꿈을 키울수 있었다"며 "지금도 우상이었던 최 선생님과 가끔 연락할 때면 20살 처녀처럼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20대 시절 여러 극단에서 활동하며 실력을 닦아온 그녀는 결혼 뒤 안양에 정착해 18년 전부터 지금의 소극장에서 극단을 이끌고 있다.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좌절과 극복
'어머니 아리랑'.
조 대표가 처음 쓴 작품 제목이다. 안양에서 극단 '창가'와 공연을 이어오던 그녀는 1990년대 초 저작권 심의가 강화되면서 창작극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당시 극단은 '품바'공연을 자주 무대에 올렸는데,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품바'를 쓴 고(故) 김시라 극작가를 찾아갔었다. 김 작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새 작품은 줄 수 없고, 대신 작품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한번도 작품을 써본 적이 없어 망설이자 김 작가께서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면 그게 작품이라고 했다"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타일가게를 운영했던 학창시절을 그대로 적어 내려가니 작품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첫 작품 '어머니 아리랑'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녀가 1999년 108개국이 참여하는 'NGO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공연할 수 있게 해줬다. 이때부터 지상파 방송국 공연 단장과 명지대 등 대학 강단에도 서며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2008년에는 자신이 직접 쓴 연극 '육영수'를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무대에 올리고, 직접 육 여사 어머니인 이경령 여사 역을 맡기도 했다. 이 연극은 육 여사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도 초청돼 700여명의 군민들 앞에서 공연됐다.
30년 고생 끝에 찾아온 성공의 순간 조 대표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작년 3월 1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있었던 삼일절 경축 행사에서 그녀는 색동예술단과 극단 창가 단원들이 함께 '3·1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이란 7분짜리 뮤지컬을 공연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8000여명의 관객 그리고 방송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시청자 앞에서의 공연은 그녀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대통령과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극단인 '창가'가 일본 극우단체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자금으로 운영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언론의 전화가 빗발쳤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악성댓글(악플)과 욕설이 난무했다.
그녀는 "잘못된 루머 하나로 30년 넘게 노력해 이룬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며 "내게 연기를 배우고 함께 공연했던 단원들과 아이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갈 때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잘못된 소문과 악플은 그녀를 6개월동안 기억상실증에 시달리게 했다. 색동예술단도 극단 창가 단원들도 모두 떠났지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안양 부흥고등학교에서 연극반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연을 하기로 결심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 참상을 일깨우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12일 1200명 관객 앞에서 청소년 뮤지컬 '사랑과 미움'을 선보이게 됐다.
그녀는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 꿈을 포기하지 않아 여기까지 왔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아이들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꿈꿀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