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불협화음'] 손발 오그라들어도 눈은 촉촉

  • 이지혜·작곡가

입력 : 2010.05.20 03:21

[이지혜의 '불협화음'] 미스 사이공

이지혜·작곡가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첫 뮤지컬은 '미스 사이공'이었다. 1990년대 초, 미국에 조기유학하던 동생이 뉴욕 브로드웨이란 곳에서 굉장한 것을 보았다며 워크맨으로 '밀녹(몰래 녹음)'한 것을 들려준 것이다. 그런데 윽, 오그라드는 손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어도 미친 닭의 울부짖음 같은 비브라토로 가득한 뮤지컬 노래는 일본 소설가 하루키에 빠져 있고 퓨전 재즈와 록을 즐겨 듣는 쿨한 소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신파(新派)였다. 음악 자체도 별로였지만 왜 이리 징그럽게 오버해서 노래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걸 좋다고 한 동생은 내게 핀잔만 들었다.

그로부터 불과 1~2년이 지나 음악으로 놀아볼 건수를 궁리하며 이런저런 자료 수집 중 '미스 사이공' CD가 손에 들어왔기에 가사를 따라가며 듣기 시작했다. 역시 별로군. 이게 노래야? 가사가 너무 유치하다. "You Are Sunlight/ And I, Moon"이라니, 햇님 달님이냐. 그리고 뭐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져? 미군에게 버림받은 베트남 여자애가 아들을 두고 자살을 하기 직전 노래를 하다니, 진짜 굴욕적이고 바보 같은 상황이군. 하지만…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그 닭살스러운 노래들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빠져들었다. 내용을 모르고 들을 때는 별로였던 노래가 특정 상황 안에서 특정 인물에 의해 흘러나올 때의 기이한 화학작용. 꽁꽁 묶어둔 내 안의 신파성을 깨우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기는지 알아보기로. 뮤지컬을 만들어 보기로.

KCMI 제공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미스 사이공'을 보았다. 김보경은 킴 역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고, 마이클 리는 한국어 발음이 조금 어색함에도 훌륭했다. 투이 역의 이경수도 빼어났다. 물론 지금도 뮤지컬의 내용은 굴욕적이고, 미군 크리스는 최악으로 우유부단하며, 자기를 버리고 떠난 남자를 3년 동안이나 기다리는 킴은 봐줄 수 없을 만큼 바보 같다. 하지만 제일 바보 같은 건 킴의 죽음을 보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