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리, 슈투트가르트 사운드가 온다

  • 성남문화재단
  • 글=이정하(음악 칼럼니스트,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박사)

입력 : 2010.04.09 10:11

하나의 악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지역 공영방송국들은 파괴된 연주회장 대신 가정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에서 각자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 재즈 밴드 등을 창단했고, 그중 몇몇은 일개 방송국 소속 악단이 아닌 세계적인 수준의 단체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도 있었다. 현재는 남서독일 방송국으로 통합된 남독일 방송국(SDR)에 의해 종전 직후인 1945년에 창단된 이래 꾸준히 음악적으로 성장했고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방송교향악단답게 이 악단은 한편으로는 고전-낭만파 교향악에 대한 모범적인 해석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20?21세기의 음악 및 흔히 연주되지 않는 작곡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1960년에만 해도 RSO 슈투트가르트는 5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초연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유럽 내의 어느 악단과 견주어도 뒤질 것 없는 악단이지만, 이 오케스트라가 그다지 개성 있는, 혹은 요즘 흔히 쓰는 표현으로 존재감 있는 악단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탄탄하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다른 방송악단들도 그만큼은 탄탄했고, 실험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송악단들도 그만큼은 실험적이었다. 전성기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전설적인 첼리비다케가 그들의 상임이었다는 것은 첼리의 연주회를 직접 본 것을 생애 최고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애호가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첼리비다케 이후 마리너, 겔메티, 프레트르를 거치는 동안 이 악단은 그저 그런 악단이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특성 없고 타성에 젖어 있었다.

한 사람의 지휘자

이른바 정격연주 혹은 시대악기 연주가 일반적인 청중에게 널리 알려진 지도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음악 작품을 그 작품이 탄생하던 시대, 지역의 연주 관습에 맞게 연주하려는 이러한 운동은 그동안 그 자체도 많이 변모해왔고, 그 운동에 참여하거나 그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도 많이 변해왔다.

사재를 털어 창단한 악단으로 분투하며 청중에게 호소하던 ‘비주류’ 지휘자 가운데 그래도 (시쳇말로) ‘잘나가는’ 이들은 객원 지휘자로서 ‘주류’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무대에 진출했다. 아르농쿠르는 빈필과 베를린필, 콘세르트헤보라는 세계 제일의 악단들이 우러러 모시는 지휘자가 되었다. ‘주류 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는 이도 나왔다. 가디너는 귄터 반트가 물러난 NDR 교향악단을 맡았다. 그러나 가디너의 주류 진출과 NDR의 파격적 인사는 실패였다. 그는 4년을 못 채우고 별다른 성과도, 소리 소문도 없이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여태껏 왜 함부르크를 떠났는지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이 분야에서 노링턴은 인정받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스타’ 지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가 가디너나 아르농쿠르만큼의 인기를 누리는 지휘자는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 지휘자와 악단이 만남으로써 21세기 초 관현악 연주계의 가장 독특한 현상이 탄생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슈투트가르트 악단 내부에서는 좀 더 인기 지휘자를 모시자는 목소리 혹은 NDR 악단의 전철을 밟지 말자는 우려도 충분히 있었을 법하고, 노링턴으로서는 자신이 창단한 악단을 이끄는 것과 기존의 대규모 악단, 그것도 관료주의가 뼛속에 스며 있는 독일에서 방송교향악단을 맡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적으로도 RSO 슈투트가르트와의 만남은 노링턴에게 커다란 도전이었고 실험이었다. 연주자들과 청중이 과연 자신의 꿈꾸는 소리와 음악에 동의할지 의문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외형적으로 바뀌어갔다. 제1, 제2 바이올린은 서로 붙어 있던 미국식 배치에서 날개처럼 좌우로 분리된 옛 유럽식으로 바뀌었고, 콘트라베이스는 빈필처럼 무대 뒤의 중앙에, 그리고 금관과 팀파니는 옆쪽에 배치되었다. 금관은 작품에 따라서는 코팅되지 않은 재질의 피스톤 없는 내추럴 악기들이 투입되었고, 쇠가죽을 씌운 소구경 팀파니가 동원되었다.

우려는 잠시였다. 1980년대 이후 예술적 발전이 다소 정체되어 있던 그 악단은 1998년 노링턴이 취임한 이래, 그의 손에서 놀라운 변신을 꾀했고 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당대의 연주 관습에 기반을 둔 이른바 정격연주 기법 및 시대악기와 근대적인 교향악단이라는 조직을 접목시킴으로써 유일무이한 소리를 창출해냈다. 언론은 RSO 슈투트가르트의 이러한 변화에 앞 다투어 찬사를 보냈으며 성공적인 결합에 의해 탄생된 그들의 소리에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노링턴은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75세를 기념해 SWR에서 이루어진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링턴은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이른바 고음악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악기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지요.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악기들이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렇게까지 많이 변화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그 악기들이 연주되는 주법입니다.

근대악기에 고악기의 연주 기법을 적용하면 훨씬 더 ‘예스럽게’ 들립니다.” 금관은 작품에 따라 옛 악기를 사용했지만 슈투트가르트 악단의 현악 주자들은 바로크 악기나 활을 쓰지도, 근대 악기에 거트현을 걸어놓지도 않았다. 슈투트가르트 사운드의 핵심은 바로 그 옛 기법으로 연주하는 근대악기, 다시 말해서 비브라토를 뺀 짧은 프레이즈의 현 소리에 있었다.

노링턴에 와서 고음악 운동은 ‘시대악기 연주’가 아닌 ‘역사적?시대적 지식이 바탕이 된 연주’로 진화했다. 이들이 시즌 기획, 혹은 장기적인 기획을 세워서 연주한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브루크너, 베를리오즈, 말러의 교향악 작품들의 연주회 실황 음반은 청중과 언론,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노링턴의 시도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평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운드’의 가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