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4.09 09:59
늙은 배우-작가-연출가가 그린 '노인의 고통'
"90까지 산다면 아무 의미 없이 움직이는 무덤이지. 넌 그걸 벌써 알아서 스스로 종말을 선택했구나."(영호의 독백 중에서)
윤수가 죽었다. 한때 잘나가던 방송국 PD였던 윤수는 은퇴 후 이혼당한 뒤 초라한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윤수의 자살 소식에 세 친구가 달려왔다. 방송 작가 나상일(권성덕), 구닥다리 배우 이영호(이호성), 그리고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서우만(이인철)이다. 친구들은 윤수의 영정을 모셔 놓고 밥상 머리에 쭈그려 앉아 소주잔을 기울인다. 화려했던 과거를 기세좋게 읊어대다가도 주름이 자글거리는 노년의 현실에 주눅든다.
유망 신인 가수로 활동하다 윤수와 결혼했던 전 부인 홍여사가 나타나면서 조용했던 빈소가 술렁인다. 친구들도 몰랐던 고인의 또다른 면모가 들춰지고, 숨기려 했던 아픔이 드러난다.
노인. 건강했던 몸의 '배신'으로 신체적 고통이 시작되고, 은퇴 이후의 '정적' 속에 갇혀 삶의 의지는 무장해제된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력감과 회한. 나이듦의 현실적 고통을 늙은 배우의 몸과 입, 늙은 극작가의 글과 늙은 연출가의 지휘를 통해 재현한 무대가 화제다.
산울림 소극장이 개관 25주년을 맞아 준비한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이다.
서우만은 등산복을 입고 윤수의 상가에 나타난다.
등산을 갔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온 것이다. 매일 등산을 다닌다는 서우만의 이유가 서글프다.
"등산은 돈이 안 들잖아? 서울 가까운 곳에 산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돈문제 뿐만이 아니다. 할 일 없이 집에 붙어 있는 게 눈치 보인다.
"(마누라는) 나를 증오하는 것 같아. 집에서 빈둥거리며 낮잠을 자는 나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눈에 그게 보여. 내가 등산을 가고 싶어 가는 줄 아니? 마누라가 집에 올 때 내가 집에 있으면 안돼. 시장에서 옷 팔면서 스트레스 받은 걸 다 나한테 퍼붓는다."
우만의 대사에 관객들은 공감의 웃음을 터트린다. 나의 아버지, 혹은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의 신세 한탄도 나이듦의 서러움이란 측면에선 같은 얘기다. 한물간 배우인 영호는 더이상 불러주는 곳이 없다. 큰 마음 먹고 연극 '맥베드'의 주인공 역을 자청했지만, 연습 도중 코피가 터져 중도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들어오는 역할은 홈쇼핑의 하자 많은 상품 광고 모델일 뿐이다.
그나마 글밥 먹고 사는 작가 상일은 가끔씩 강의도 다니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근근히 연속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성기능 저하의 내밀한 아픔을 토로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고령화 과정을 겪고 있다. 노인들은 치매와 건망증, 질병의 공격 속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속수무책으로 늘어나는 노인 인구를 위한 실질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은 가동되지 않는다.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은 극작가 윤대성 서울예대 교수가 극본을 썼고 극단 산울림 대표 임영웅이 연출했다.
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느새 내가 노인이 되었다. 남들이 늘 나더러 학생처럼 젊어 보인다고 말하는 걸 곧이 듣고 철없이 행동하고 옷도 젊게 입는데 지하철을 타면 애들이 어김없이 '할아버지'라 부른다. 나도 세월을 비켜갈 수 없나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내가 아는 친구들이고 죽은 이 조차 나의 친구다. 모든 내용이 실제 이들이 겪고 내가 경험하는 현실을 그렸다. 노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라고 밝혔다.
다소 문어체적인 표현이 귀에 낯설고, 삶을 단정짓는 은유가 과하게 쓰여진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힘찬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한 분야에서 뚝심있게 일가를 이룬 배우와 작가, 연출가의 노익장에 보내는 존경의 표시다. 공연은 5월 2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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