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은 쳐도 베토벤은 안쳐요" '피아노 여제'의 까다로운 입맛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4.07 23:47 | 수정 : 2010.04.07 23:47

[클래식 ABC] 아르헤리치와 슈만 협주곡

'피아노의 여제(女帝)'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Argerich)는 레퍼토리에 대해서는 입맛이 까다롭기로 악명 높습니다. 모든 피아니스트가 경전처럼 떠받드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아직 협주곡 4번을 연주하지 않았지요. 지난 2008년 아르헤리치와의 대담에서 전 남편이자 동료 피아니스트인 스티븐 코바셰비치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르헤리치는 "어린 소녀였을 때 베토벤은 내게 신(神)과 같았다. 진정 사랑하는 건 손대지 않는 편이 현명하기 때문 아닐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아르헤리치는 '저녁의 대화(Evening Talks)'라는 인터뷰에서 베토벤의 협주곡 4번을 처음 들었을 당시를 회상합니다. 6세 때 클라우디오 아라우(Arrau)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듣다가 깜빡 졸고 있었는데 "2악장에서 트릴(trill)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율과 같은 충격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지난 2008년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왼쪽). /CMI 제공
아르헤리치의 까다로운 음악 취향은 스승인 명(名)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Michelangeli)에게 물려받은 것입니다. 스승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극히 일부밖에 연주하지 않았으며 쇼팽과 슈만, 드뷔시와 라벨 등 한정된 레퍼토리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한번 고른 곡에서는 완전무결할 만큼 빼어난 기량과 해석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아르헤리치가 거침없이 애정을 토로하는 곡도 있습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작곡가 슈만(1810~1856)의 피아노 협주곡이 그렇습니다. 그는 이 곡에 대해서는 유명 지휘자나 악단과 수차례 음반과 영상을 남겨놓았습니다. 슈만 타계 15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지휘 리카르도 샤이)와 협연에서 아르헤리치는 대담무쌍하게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면서 유려하게 곡을 펼쳐보입니다. 슈만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작곡가에게 보내는 경배입니다.

스위스 루가노 페스티벌에서 아르헤리치가 협연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EMI)이 '음악 가족'의 따뜻한 대화 같다면, 고(古)음악의 거장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녹음한 슈만의 협주곡 음반(텔덱)은 같은 곡을 두고 새로운 표현법을 찾아나서는 탐구 같습니다.

일본에서만 발매된 희귀음반도 있습니다. 2001년 정명훈이 지휘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아르헤리치가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협연한 슈만 피아노 협주곡 실황입니다. 지휘자는 따뜻하면서도 진중하게 협연자를 배려하고, 피아니스트는 서서히 열정을 내뿜기 시작합니다. 둘은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또다시 슈만의 협주곡으로 조우(遭遇)합니다. 둘의 앙상블은 이번엔 어떤 색깔일까요.

▶정명훈과 아르헤리치의 협연, 9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02)547 -5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