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삶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0.04.08 02:59

"체호프는 지루하다"는 편견 깬 연출가… '벚꽃동산'으로 돌아온 지차트콥스키
"체호프 드라마는 '웃긴 비극' 결말도 따로 없어… 그저 일상이 지속될 뿐"

이번엔 또 어떤 연금술을 보여줄까. 안톤 체호프(1860~1904)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51)만큼 신뢰감을 주는 극작가·연출가의 조합도 드물다. 희곡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등을 쓴 체호프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지만 한국의 대중에겐 "난해하다" "지루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2001년 러시아 최고 권위의 황금마스크상을 차지한 지차트콥스키는 2004년 '갈매기'로 그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이 연극은 서울 예술의전당 20년 역사상 가장 좋았던 작품으로 선정됐다.

체호프 탄생 150주년인 올해, 지차트콥스키는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이번엔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 '벚꽃동산'이다. 지난 5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객석에서 만난 지차트콥스키는 불 꺼진 무대를 한참 들여다봤다. 연출가에겐 저 깊은 어둠이 캔버스다.

"체호프의 드라마에는 끝이 없다. 시간은 흐르고 일상이 지속될 뿐이다. '웃긴 비극(comic tragedy)'이다. 그는 아주 비극적인 상황에서 희극성을 발견하는 작가다. 풍선도 펑 터지려면 부풀어야 하지 않나."

체호프는 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쓰냐는 질문에“내 안에 노래가 많고, 다 부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출가 지차트콥스키는“체호프의 작품은 고정된 틀이 없어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지차트콥스키는 진지했지만 웃음도 많았다. 2004년의 '갈매기'와 마찬가지로 '벚꽃동산' 연출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연출가가 작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연출가를 고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한국 배우들과 새 작업에 임하는 각오를 묻자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자, 샴페인을 마시지 말라!'는 러시아 격언을 들려줬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체호프는 숨을 거두기 전 '내가 죽으면 샴페인을 터뜨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차트콥스키는 "그는 죽음을 평화이자 축제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체호프는 소심했고, 그의 하루하루는 질병과 통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삶 자체가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 연출가는 "바로 그래서 웃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체호프의 드라마에서 웃음은 샴페인 거품처럼 올라왔다가 사라진다. 지차트콥스키는 "삶의 가치들은 다른 쪽에서 거리를 두고 보면 때론 웃기다"면서 "체호프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벚꽃동산'은 러시아 봉건 귀족의 붕괴와 계층갈등을 그린다. 과거의 습관과 낭비벽으로 벚꽃동산을 잃게 되는 라넵스카야 부인이 주인공이다. 지차트콥스키는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벚꽃동산이다. 거기에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아쉬움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연습할 때 그는 배우에게 질문이 많다. 지차트콥스키는 "배우는 배역에 대해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나는 계속 묻는다. 배우들은 결국 자기가 맡은 인물을 만들어간다. 어느 날 펑 꽃피우는 벚나무처럼 말이다."

그는 한국의 국립극단 예술감독 후보로 꼽힌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공정한 배우 선발(오디션)을 위해 편견이 없는 외국인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차트콥스키는 그러나 이와 관련된 질문에는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초연(1904년)된 지 100년이 넘은 '벚꽃동산'에 요즘 한국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까. 지차트콥스키는 "꿈을 꾸고 현실과 부대낀다는 점에서 사람은 그대로"라고 했다. 이 연극은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를 내며 끝난다. 연출가는 "강렬한 엔딩을 기대하라"고 귀띔했다.

▶5월 28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신구·이혜정 등 출연. (02) 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