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명대사, 맛나게 좀 읊어주지

  • 박돈규 기자

입력 : 2010.03.17 23:36

[리뷰]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때론 헛것이 진짜를 이긴다. 전쟁으로 절반은 초상집이 된 마을에서 펼쳐지는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연출 이병훈)는 그 표본이다. 빵 조각만도 못한 푸대접을 받던 유랑극단 배우의 연극이 현실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못난이의 숭고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신화적인 드라마다.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서 소피아(가운데)가 위협당하는 장면. /명동예술극장 제공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된 세르비아의 마을. 과부가 대부분인 주민들은 난리 통이라 연극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배우들은 공연을 해야 하고, 그들 중 필립(정나진)은 광기에 사로잡혀 늘 연극 속에서 산다. 공연을 금지당하고 무일푼으로 짐을 싸며 던지는 "《벚꽃 동산》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팔아볼까" 같은 대사는 연극의 끝없는 유랑과 가난을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나무칼을 든 필립이 복수극 《오레스테스》의 한 장면을 연기한 것이 점령군을 향한 테러로 오인돼 총에 맞아 죽는 엔딩은 강렬했다. 허구일 뿐인 그의 연극이 진짜 저항군의 목숨을 구하고 주민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이불과 의상이 가득 걸린 빨랫줄로 한 덩어리의 삶·연극·죽음을 빗댄 것도 좋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관객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경험으로 남지는 못했다. 배우들은 거칠고 확신이 없어 보였다. 인물과 대사를 소화하지 못했고, 연출의 장악력과 리듬감도 아쉬웠다. 이 훌륭한 희곡 아래 흐르는 저류(底流)를 길어올리지 못한 채 표면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럴 때 연극은 겉돈다. 명대사들은 뜬구름처럼 떠다니고, 배우의 말과 행동은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부터 멀어지고, 관객은 집중력을 잃고 피로해진다.

▶2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