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최광호의 크레이지 포토] 난 작업실 옮길 때마다 가슴이 떨려

  • 최광호 사진가

입력 : 2010.03.13 06:19 | 수정 : 2010.03.13 19:46

사진가에겐 작업실이 두 개 있다. 현장과 암실(暗室)이다. 10년간의 외국 유학 끝에 처음 마련한 작업실은 '청량리 588' 한복판에 있었다. '예술=사람 사는 흔적'이라는 생각에 오픈스페이스 개념으로 만들었는데 반응이 달랐다.

남자들은 재미있어 했지만 여자들이 오면 '왜 이런 곳이어야 하느냐' '역시 최광호식이다'라고 했다. 당시 내가 고민하던 것은 '우리다운 것, 우리 것이 진짜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사진은 나보다 먼저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만든 '메이킹 포토'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우리다운 것'에 집착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국경일(國慶日)이었다.

국경일은 이 땅과 국민과 의식이 관통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땅에서 가장 큰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6·25였다. 그래서 1994년 '하늘과 땅 시작 6.25'란 오픈스페이스 전시를 시작했다.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전시도 하고 퍼포먼스도 하며 친구들과 놀았다. 친구 수철이가 기타를 반주하고 나는 몸으로 표현하며 슬라이드영상 사진놀이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시도였으며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확신도 얻었다.

2년 뒤 여름휴가 때 나는 처음 가족들과 가평 남이섬 근처 강가로 갔다. 그 해 8월 15일이 연휴(連休)여서 서울 집에서 저녁 10시에 출발해 가평에 새벽 6시쯤 도착했다. 그 긴 시간 나는 동생 순호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동생이 시인이어서 주제는 주로 예술이었다. 동생과의 마지막 대화는 경춘 국도 화도휴게소 화장실에서 이뤄졌다. 그때 동생은 '내가 돈을 버니 형은 사진이나 열심히 해. 난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되잖아'라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잠에 빠져 있는데 딸아이가 나를 깨웠다. "삼촌이 물속에 들어갔는데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참으로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나를 앞에 두고 사람들이 흥정을 붙여왔다. 죽어 물에 빠진 사람을 두고 500만원을 주면 시체를 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생을 건져낸 사람은 물속으로 뛰어든 나였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달라졌다.

어머니는 동생이 떠오를 때면 '광호 못된 놈, 너나 죽지 착한 순호 죽였느냐'며 통곡했다. 그 다음해 8월 15일 나는 집부터 동생이 죽은 곳까지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10년간 이 일을 해 연 전시가 '동행 하늘과 땅 8·15'였다.

내 두 번째 작업실은 서울 삼선교에 있었다.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집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세 번째로 상계동 '갤러리1019'로 옮겼으며 네 번째는 경기도 부천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이 새로워졌고 사진도 달라졌다. 나는 작업실이 스스로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작업실이 '나'를 담는 그릇이기에 그 크기에 따라 작품의 크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주변 환경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청량리 작업실에서는 홍등가(紅燈街) 아가씨들과 친해지면서 남녀의 본능에 대한 작품을 많이 했고 부천 작업실에서는 자연에 다가가는 근원적 순환의 작업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을 완전히 벗긴 뒤 대형 인화지 위에 올려놓고 포토그램을 한 것이다. 이제 나는 이달 말쯤 강원도 평창의 한 폐교(廢校)로 작업실을 옮긴다. 강원도는 내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날지를 꿈꾸면 가슴이 설렌다. 작가에게 이런 상상은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하고 빨아들여 다시 불태워 용해시킨 뒤 다시 폭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