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행복한 '파리넬리'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3.09 23:17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
훈련만으로 女 음역대 소화… 헨델 '메시아'로 세계적 명성
이달 국내서 감상할 기회

바로크시대는 거세(去勢)를 통해서 여성의 음역(音域)에 도달했던 남성 가수를 의미하는 '카스트라토(castrato)'의 전성시대였다. 그들은 영화 《파리넬리》의 동명(同名) 주인공처럼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조명을 한몸에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불행했던 이중적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두성(頭聲)을 활용한 끊임없는 훈련으로 여성 음역에 이르는 남성 성악가를 '카운터테너(countertenor)'라고 부른다.


현재 세계 정상급 카운터테너인 독일의 안드레아스 숄(Scholl·42)은 어릴 적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음역(高音域)을 살려나간 경우다. 17일부터 내한 리사이틀을 갖는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13세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노래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1981년 정초에 바티칸의 미사에서 세계 각국 어린이 합창단원 2만여명이 모여서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2~3일 전에 갑자기 독창자를 모집했고 운 좋게도 제가 거기에 뽑혔지요."


 

훈련을 통해 여성의 음역에 이르는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은“남자냐 여자냐 하는 구분보다 중요한 건‘훌륭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냐는 것”이라고 했다. / 고양문화재단 제공
숄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로 친숙한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그는 "고향에서 2㎞밖에 떨어지지 않은 에버바흐수도원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감독이 합창단을 찾아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를 수 있는 젊은 단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화배우 션 코너리의 곁에서 노래하는 장면이었는데, 잠깐 나오기 때문에 지금도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웃었다.

숄은 평소 바리톤에 가까운 나지막한 중저음(中低音)으로 대화하지만 노래할 때에는 두성을 활용한 발성으로 알토의 음역까지 소화해낸다. 어릴 적 고음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서 카운터테너를 권유받았고 스위스 바젤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중 역시 카운터테너 출신의 명지휘자 르네 야콥스를 만났다. 1992년 야콥스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흘 전에 공연을 취소하자 대타로 무대에 섰다. 이듬해에는 파리에서 야콥스의 지휘로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불렀고, 또 다른 바로크음악 명지휘자인 윌리엄 크리스티가 라디오 방송으로 그 공연을 들었다. 숄은 다음 날 기차에서 우연히 크리스티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크리스티가 지휘한 헨델의 《메시아》 녹음에 참여했다. 이 음반이 절찬을 받으면서 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옛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알프레드 델러와 야콥스, 마이클 챈스와 숄, 필립 자루스키까지 카운터테너의 인기도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가운데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는 숄의 목소리를 통해 더욱 친숙한 아리아가 됐다. 하지만 숄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구분보다 더 중요한 건 '좋은 성악가인가, 아닌가'하는 점이며 '나쁜 카운터테너'와 '좋은 여성 알토'가 있다면 나 역시 '좋은 여성 알토'를 고를 것"이라고 했다. 17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 18일 고양아람누리, 2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잇달아 열리는 리사이틀에서 숄은 헨델과 존 다울랜드, 퍼셀의 오페라 아리아와 노래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