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줄게 美를 다오

  • 안산=손정미 기자

입력 : 2010.03.08 23:17

지자체, 미술가 위한 '레지던시' 설립 붐… "관광·문화 연결 고리로"
작업실 내준 지역은… 미술관 없어도 작품 전시
'예술촌' 만들어 관심 끌고, 작가가 학교 찾아 교육도
작업실 구한 작가는… 동료들과 교류하며 '자극'
해외 관계자 만날 일 잦아 수상과 맞먹는 경력 돼

조각가이자 화가인 이순종씨는 지난 3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는 경기창작센터에서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서 첫 밤을 보냈다. 이씨는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는 집중하기 힘들었는데 처음 레지던시에 들어와 넓은 공간을 혼자 쓸 수 있어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고 말했다.

최근 미술 분야의 레지던시 공간이 많아지면서 '레지던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레지던시(Residency)는 작가에게 3개월~2년 동안 입주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지난 2년간 지방자치단체, 사립미술관·갤러리의 레지던시가 설립 붐이라고 할 만큼 경쟁적으로 세워지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지난해 12월 광주·전남지역 작가들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레지던시를 세웠고, 인천광역시는 작년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을 열었다. 서울시는 지난 2006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개관한 데 이어 작년 말과 올 초에 금천예술공장과 문래예술공장을 개관했다.

서울시가 설립하고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레지던시‘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사진가 김도균(사진·위)과 미디어 설치작가 한승구.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레지던시가 부흥기를 맞고 있는 것은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광주나 부산처럼 국제비엔날레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레지던시를 통해 '예술촌'을 형성하고 미술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강남대 교수)은 "지역에 미술관을 지으려면 운영이나 작품 구입에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 어렵지만 레지던시는 작가들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해주고 결과물도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선호된다"고 말했다. 경기창작센터를 운영하는 경기도미술관의 김홍희 관장은 "창작센터는 지역 관광과 문화를 연결하는 고리가 될 것"이라며 "작가들이 찾아가는 학교 교육 등 다양한 지역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역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당수 작가는 작업 공간을 갖는 것 외에도 국내외 작가나 전시기획자·비평가들과 네트워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레지던시 입주를 원하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의 경우 올해 입주 작가 35명을 뽑는 공모에 857명이 응모했고, 이 중 460명이 외국 작가들이었다. 영국에서 온 사이몬 몰리씨는 "최근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이곳에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만난 판화가 강정헌씨는 "동료나 선배의 작업을 보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자극을 얻는다"고 말했다. 가나아트가 운영하는 경기도 장흥아뜰리에는 50여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어 국내뿐 아니라 홍콩 크리스티 등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자주 찾는다. 그래서 작가들은 레지던시 입주를 공모전 수상과 맞먹는 주요 경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레지던시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실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그동안 국내 레지던시가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이제는 질적인 면을 챙겨야 한다"면서 "작가들이 사용하는 시설과 프로그램 운영이 충실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라익스아카데미(Rijksakademie)는 매년 25명 작가를 뽑는 공모에 2000명 가까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곳은 전문가가 작가에게 재료와 기술을 지원해주고 유명 작가들의 강의와 워크숍이 진행된다. 프랑스의 르 프레누아(Le Fresnoy) 국립현대미술스튜디오는 교육기관과 레지던시의 중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입주한 미디어 작가 나비(본명 이희원)씨는 "르 프레누아는 세계에서 모인 젊은 작가들에게 시설 이용과 함께 1300만원 정도의 창작지원금을 제공하며 세계적인 작가들이 찾아와 세미나에 참여하거나 작품 제작에 동참한다"고 말했다. 김홍희 경기도미술관장은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작가들에게 작업 지원비와 함께 국제적인 미술계 인사들과의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