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思母曲이 된 춤곡 '파반느'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3.03 23:36

피아니스트 임동혁… 고인된 어머니 추모하며 처음과 앙코르 곡으로 연주

평소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고 쾌활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달 고양아람누리에서 열린 독주회에서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이날 첫 곡으로 연주한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 때문에 보통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는 곡입니다. 하지만 임동혁은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추모하는 뜻을 담아 첫 곡으로 넣었습니다. 연주자가 곡과 곡 사이에 간간이 한숨을 토하며 천천히 건반에 다가가자, 객석도 더불어 차분해집니다.

파반느는 16세기 무렵부터 유럽 왕정에서 사랑받던 느린 템포의 춤곡입니다. 24세의 청년 작곡가 라벨은 1899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피아노곡으로 먼저 작곡했고, 1910년 오케스트라를 위해 다시 편곡했습니다. 이때는 호른에 선율을 맡겨 은은함과 아련함을 더했지요.

지난해 타계한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으로 라벨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임동혁. / 크레디아 제공
신비함을 간직한 제목 때문에, 작품 뒤편에 숨어 있을 법한 사연에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본 뒤 영감을 받았다고도 하고,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공주의 생일》의 제목을 재치 있게 뒤집어놓은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라벨 자신은 "스페인 궁정에서 파반느에 맞춰 춤을 추었을 법한 어린 공주를 떠올리게 한다"는 힌트만 주었지요.

수수께끼를 담은 제목과 우아한 선율은 후대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됩니다. 춤은 속세의 것이요, 죽음은 그 너머의 세계인데 맞물려놓으니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것이지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소설가 박민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장편소설에서 1986년 당시 스무살의 주인공 청년은 생일선물로 레코드 한 장을 받습니다. "상단 타이틀엔 커다란 필기체의 불어(佛語)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고 적혀 있었다. 개봉된 나의 스무살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턴테이블 위에서 막 회전을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곡을 들으며 "날지 못하는 새떼처럼 실내를 서성이던 느린 음표들, 흐르는 무곡(舞曲)과 머릿속에 그려지던 죽은 여인의 얼굴, 어둠 속에서 귀를 굽히고선 나무들과 풀어헤친 북극의 머리카락처럼 땅을 뒤덮던 바람"을 떠올립니다. 여느 곡(曲) 해설보다 더 서정적이고 운치 있는 감상입니다.

작곡가 라벨에게는 춤추는 왕녀의 모습이었고 소설가 박민규에게는 스무살의 사랑이었지만, 임동혁에게 이 곡은 세상을 먼저 떠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思母曲)이 되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임동민·동혁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 입상하던 무렵부터 어머니는 두 아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했기에 그리움도 더욱 컸을 터입니다.

라벨에서 시작한 이날 독주회는 쇼팽과 프로코피예프를 거쳐, 앙코르에서 다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돌아왔습니다. 보통 환호로 끝나던 객석도 이날만큼은 시종 진지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인께서도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잠드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