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2.10 23:34 | 수정 : 2010.02.10 23:35
영화 '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 10주년 맞아 元年 배우 총출동
"근심 걱정 털어버리고 이 한 세상 놀아보자. 숨이 끊기면 니가 어딨고 내가 어딨느냐. 공길아!"
불려나온 공길은 연산에게 "바보, 젖 주랴~"하며 녹수를 흉내낸다. 기분이 풀린 연산이 공길에게 덜컥 종4품의 벼슬을 내리자 화가 난 녹수가 "공길이 사내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자"고 한다. "벗어, 어명이다!" 공길은 벗어야 한다.
'이(爾)'란 조선시대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광대 출신으로 웃음과 몸을 바쳐 이 칭호를 들은 인물이 바로 공길이다. 이 연극은 장녹수의 연적(戀敵)으로 모든 사회적 경계를 뛰어넘은 공길의 삶을 따라가며 웃음과 죽음이 만나는 모서리를 보여준다. 연산군이 좋아했다는 광대극은 동성애로 고조된 갈등과 긴장을 이완시키는 장치다.
공길의 동료 장생은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천생 광대다. 녹수는 공길의 필체를 본떠 장생에게 역적 누명을 씌우고, 죽음을 눈앞에 둔 장생은 "죽으려니 놀고 싶다"며 판을 청한다. 유명한 봉사놀이다. 장생은 '강 건너 강봉사', 공길은 '들 질러 봉봉사'가 된다.
"이거 봐,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없어?"(봉봉사)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없다니까"(강봉사)
광대는 웃음을 짜내는 직업이다. 공길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김태웅은 "처음 쓸 때는 공길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으면서는 연산에 끌렸고, 요즘엔 광대패가 주인공 같다"고 말했다. "광대의 웃음과 놀이로 삶을 긍정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태어났다. 배우 오만석은 "그해 여름 희곡을 처음 읽을 때 펑펑 울었다. 그런 경험은 전무후무하다"며 "초연 무대에 오른 게 배우로선 행복한 일이고 큰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오디뮤지컬컴퍼니와 극단 우인이 공동 제작한다.
연산은 공길을 잃고 울부짖는다. "이제 아무도 없구나. 너도, 나도 없구나. 이게 그렇게도 바라던 끝이구나. 나도 어둠 속으로 데려가다오." 《이》의 광대는 죽어도 죽지 않는, 죽어야 사는 사람이다.
▶27일부터 3월 2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1544-1555
● 장생役 이승훈이 공길役 두 배우에게…
"만석이는 조강지처 같고호영이는 바람 피우는 듯"
이날 연습실에는 '마지막' '은퇴' 같은 단어가 범람했다. 공길 역의 오만석이 "뮤지컬 버전을 검토 중이고, 공길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데 이어 김내하·진경 등도 "나이를 먹어서 이젠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동조했다. 김내하와 연산을 나눠 맡는 전수환은 "작년에 연극 '품바'를 하면서 연극은 그만하려고 했는데, 거지보다는 왕 역을 하고 물러나겠다. 내 은퇴 무대다"고 했다. 하지만 10년 동안 장생을 도맡았던 이승훈이 "눈치가 보여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할 때는 후배 배우들이 야유를 보냈다.
이번 연극에 대해 오만석은 "공길이 광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공길 역을 번갈아 맡는 김호영은 "공길은 꽃은 꽃인데 온실 속의 꽃"이라고 했다. 이승훈은 "만석이는 조강지처 같고 호영이와는 바람 피우는 느낌"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