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널린 고구려 성터… 고분 위엔 전깃줄이 지나가고…

  • 단둥·환런·지안=글·사진 허윤희 기자

입력 : 2010.01.27 05:45 | 수정 : 2010.01.27 11:09

중국 요동지역 '초기 고구려 유적지' 가보니
세계문화유산 '광개토대왕릉'도 말뚝 박힌채 관광객들에 밟혀…
"만리장성 동쪽은 이곳부터 시작"박물관 세워 버젓이 거짓 홍보도

지난 23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의 초기 고구려 유적인 하고성자(下古城子) 성터.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길을 따라 10분쯤 걸었더니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대문을 통과해 뒷마당에 들어서자 성벽 흔적이 뚜렷했다. 고구려 초기에 평상시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가정집 뒷마당에 방치돼 있었다. 쓰레기 더미와 땔감용 나무들이 가득했다.

"이곳이 이 유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벽 흔적입니다. 민가가 들어서면서 체계적인 조사나 정비가 되지 않은 상태예요. 이곳뿐 아니라 환런과 지안(集安)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은 심각하게 파괴됐습니다."


 

중국 지안시에 있는 국내성 성벽. 현재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한 이 성벽은 모두 중국이 새로 개·보수한 것이다. 원래의 유적으로는 2000~2003년 발굴 결과 확인된 치(雉)가 일부 드러나 있다.

고구려 유적 답사를 위해 이곳을 찾은 고조선학회(회장 서영대) 회원들은 복기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지난 2004년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五女山城)과 두번째 수도 국내성(國內城), 환도산성·장군총·무용총·광개토대왕릉비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하고성자처럼 세계유산 등재에서 제외된 고구려 유적들은 고증이나 보존의 혜택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인근에 있는 초기 고구려 고분군 상고성자(上古城子) 유적은 눈에 덮인 돌무덤 20여기가 200여m 근방에 흩어져 있지만 별다른 시설이나 안내원조차 없었다. 무덤군(群) 바로 옆에는 공장 건물이 들어서고, 무덤들 위로 전깃줄이 쳐져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200여기가 남아 있었는데 1990년대 초 중국이 개발 사업을 시작하면서 싹 밀어내 버렸어요. 제대로 된 발굴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중국 환런(桓仁)현 상고성자(上古城子) 무덤군. 고분 위로 전깃줄이 지나고 전봇대가 유적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들도 외형적으로는 잘 정비돼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훼손이 심각했다. 지린(吉林)성 지안시의 국내성 유적은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2000~2003년 5000㎡의 성터 내부를 발굴조사한 결과 확인된 치(雉·방어를 위해 성벽 밖으로 쌓은 돌출부)가 일부 드러나 있을 뿐이고, 네모꼴의 돌로 쌓은 석축은 중국이 새로 개·보수한 것이라고 했다.


유명한 광개토대왕릉(태왕릉)과 장군총(장수왕릉)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비에서 30여m 떨어진 태왕릉은 말뚝을 박고 계단을 만들어 봉분 위를 관광객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 고구려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회분 5호 고분 내부는 결로(結露) 현상으로 생긴 물방울이 벽화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벽화는 심각하게 훼손돼 그림의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중국 단둥(丹東)시 후산장성(虎山長城). 중국 당국은 고구려 시대 성곽 위에 성곽을 새로 만들고 역사박물관을 지어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반면 동북공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랴오닝성(遼寧省) 단둥(丹東)시 후산장성(虎山長城) 역사박물관 건물에는 '중국 명(明)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는 문구가 한글로 선명하게 써 있었다. 중국은 후산장성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 기점이라며 지난 2004년 이 박물관을 개관했다. 그리고 지난해 명나라 때의 만리장성이 기존의 허베이(河北)성 산하이관(山海關)보다 훨씬 더 동쪽으로 떨어진 압록강 하류의 랴오닝성 후산장성에서 시작한다고 공식선언하고, 만리장성의 길이가 종전(6300㎞)보다 더 길어진 8851.8㎞라고 발표했다. 만리장성이 '느닷없이' 동북쪽으로 계속 뻗어 올라가 요동 북쪽의 창투(昌圖)에 이르고,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변에 이른다는 주장이었다. 복기대 교수는 "만리장성 동쪽 기점을 압록강변으로 확대하려는 것은 고구려가 활약했던 요동 지역을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의도"라며 "이곳에 오는 중국 관광객들은 만리장성이 진짜 여기서부터인 줄 안다"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새로 문을 연 번시(本溪)박물관에는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과 지방정권의 하나"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다는 명확한 증거 유물들이 환런과 지안 일대에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도 문화재 보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개탄스럽다"며 "특히 세계 최고의 적석총인 광개토대왕릉을 훼손된 상태 그대로 두고 복원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다른 능 복원과는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의도적 고구려 왜곡은 한반도 개입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