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1.24 23:24
더이상의 캐스팅은 없다! 무대 밑 정명훈은 호쾌하고 무대 위 성악가는 든든하고
막이 열리면 주인공들은 저마다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고, 아들 이다만테는 정해진 결혼 상대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갈등한다. 트로이의 여인 일리아는 적국(敵國)의 왕자 이다만테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유머 속에서도 세태풍자를 촌철살인으로 담아냈던 모차르트의 후기 희극 오페라와는 사뭇 다른 진지함이 이 작품에 녹아 있다.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이소영)이 국내에서 초연한 이 오페라는 지휘자와 악단에서 성악가까지 '초호화 캐스팅'으로 개막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이도메네오 역의 테너 김재형은 국왕에 걸맞은 위엄과 힘을 선보이며, 든든하게 오페라의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음표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1막 후반의 아리아에서 까다로운 바로크 창법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古)음악의 명지휘자 르네 야콥스(Jacobs)와 함께 이 오페라를 녹음했던 소프라노 임선혜가 일리아 역을 맡은 것도 적잖이 반가운 낭보(朗報)였다. "노예 신분인 내가 그의 마음의 노예가 되었네"라고 탄식하는 첫 아리아부터 임선혜는 특유의 깨끗하고도 순수한 목소리 결을 선보였다. 다만 사랑의 대칭선에서 일리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엘레트라 역의 소프라노 헬렌 권은 녹록하지 않은 관록에도 불구하고, 종종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부쳤다.
원작 자체가 트로이 전쟁 이후의 그리스 신화를 다룬, 일종의 외전(外傳)에서 출발하기에 현대적 시각에서는 다소 복잡하고 난삽한 구석이 있다.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이면서 연출까지 맡은 이소영은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 빛과 어둠의 명암 대조와 군중의 역동적 동선(動線)을 강조했다. 대형합창단을 때때로 전진배치하면서 '그랜드 오페라(Grand Opera)' 같은 맛을 첨가했지만,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뚝심 있게 관통해내지는 못했다. '감독 겸 선수'로 나설 때 화려한 캐스팅을 직접 섭외할 수 있는 강점과, 연출과 행정을 도맡아야 하는 단점을 함께 보여준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