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논술] 원(元), 절개 지킨 은둔문화 유행으로 문인화 발달

  •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미술 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 저자

입력 : 2010.01.20 15:44

전선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몽고제국, 원나라(元, 1271∼1368)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원나라는 이전 한족 문화가 주도했던 회화의 발달에 있어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화풍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사가들은 원대의 미술을 '회화의 혁명기'라고 말할 정도로 변화의 폭이 컸다.

원(元)나라 건국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한족과 갈등을 겪었다. 원 세조인 쿠빌라이 칸(1260~1294년 재위)이 한족과의 융합정책을 사회 전반적으로 펼쳤으나 오래도록 한족 문화와 역사적 정통성을 숭상해왔던 송나라 유민들은 자신들이 '오랑캐'라 불렀던 몽고족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는 화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절개를 지킨 문인화가, 전선

쿠빌라이 칸 재위 당시, 송나라 황실 출신의 화가 겸 서예가인 조맹부(1254~1322)가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원 조정에서 지위가 한림학사, 영록대부에 이르렀으며, 죽은 후 위국공에 봉해질 만큼 큰 신뢰를 받았다. 조맹부의 일파 또한 그의 연줄로 벼슬길에 나가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조맹부와 같은 고향 출신이었던 전선(錢選, 1235~1307년)만은 원나라를 섬기지 않고 시와 그림에 전념하며 평생을 마쳤다.

전선은 원 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교양인으로 꼽히는 조맹부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화가였다. 이민족 조정의 관리로 녹을 받고는 살 수 없다며 개인적 출세와는 담을 쌓고 시골에서 은둔하며 시서화에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후대에 조맹부보다 그를 존경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전선 역시 조맹부와 같이 글씨와 그림에 있어서 복고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산수화는 당나라 때 나뉜 남북 양종의 경향을 종합한 복고적인 것이었다. 그는 화조화(花鳥畵), 특히 화훼의 절지화(折枝畵)에 뛰어났으며, 만족스러운 작품에는 제시(題詩)를 지어 넣었다. 화풍은 사실적이고 중후한 채색의 아름다움이 특징이었다.

전선, ‘왕희지관아도’, 원(元), 종이에 수묵 채색, 23.2×92.7㎝,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왕희지관아도'는 그의 복고주의 성향과 문인화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 서예사에서 최고로 글씨를 잘 썼다 하여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진나라의 왕희지에 대한 고사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왕희지의 서체는 중국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데 그의 대표작 '난정서(蘭亭敍)'는 중국 서예미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중국 황실이 그의 글씨를 애호하고 널리 수집했을 정도다. 현재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 난정서는 당나라 태종이 소장했을 당시 황궁 최고의 서예가 네 명에게 똑같은 복제품 10개를 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송나라 때는 수백 개의 복제품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왕희지관아도'는 왕희지가 연못의 거위를 보며 쉬고 있는 그림이다. 왕희지는 글씨를 쓸 때의 붓의 움직임이 마치 부드러운 거위 목의 움직임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쉬면서도 붓글씨 공부를 했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둔문화와 문인화의 발달

원나라 때에는 문인화가 크게 발달해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유행한 은둔문화가 한몫 했다.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한족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은둔하면서 대신 시서화에 심정을 의탁하고 표현하면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문인들의 수가 많아졌다. 이렇게 발전한 문인화는 원나라 회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특히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라고 불린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원대 후기에 은거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산수화풍을 확립한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다. 이런 은둔생활로 인한 문인화 발달의 대표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바로 전선이다.

※더 생각해볼 거리

동양 문화권에서 발달한 문인문화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발달 배경과 그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 서양 문화권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