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1.20 23:29
부상 완치 후 복귀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5년 만에 마주앉은 그녀는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 정도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야… 다시 악기를 쥐니 미칠 것 같다"고
지난 16일 미국 뉴욕 87번가의 아파트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바이올린의 여신(女神)' 손에 활과 악기가 아니라 커피가 쥐어진 모습은 낯설었다. 지난 2005년 정경화는 왼손 검지 부상으로 활동을 잠정중단했다. 5년간의 칩거는 팬들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무척 길었을 법 싶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동안 시련은 겪을 만큼 겪었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여운은 꽤 길었다. 1989년 영국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가족들이 행여라도 걱정할까, 정경화는 "입 밖에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예정돼 있던 버르토크(Bartok)의 음반 녹음을 미룬 것이 유일한 후유증이었다. 1985년에는 C형 간염으로 의료진이 꼼짝 않고 휴식하라고 권고했지만, 정경화는 숨 가쁜 협연과 녹음 일정을 강행했고 20년에 가까운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때마다 온몸이 마디마디 아프고 고단한 게 이루 말할 수 없더라고. 피검사하고 약 먹고 주사 맞고, 그렇게 버텼지."

2005년 러시아의 명(名)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앞두고 갑자기 왼손 검지 부상을 입었을 때도 정경화는 "오늘 밤만 연주할 수 있다면 어떻게 돼도 좋으니 제발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5년간의 휴식이 아쉬움으로 남진 않았을까.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은 앞으로 가장 많이 나아가는 거야. '죽어도 못 살겠다'라고 소리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터득하는 거고. 사람이 아무리 약한 존재 같아도, 우리에겐 모두 이겨낼 힘이 있어."
'바이올린 여신'의 복귀 일자가 임박했다. 오는 5월 4일 영국의 명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지휘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내한공연에서 정경화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5년 전 부상으로 아쉽게도 연주하지 못했던 그 곡이다.
"안 해본 건 반드시 후회로 남아. 아슈케나지도 협연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래서 더 기를 쓰고 하겠다고 했지."
부상 완치 후 하루 1~2시간 연습하면서 점검에 들어간 그는 "조금씩 몸을 달래서 악기를 붙잡을 때마다 말을 못할 정도로 미칠 듯이 좋다"며 웃었다.
현재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그는 "젊은 세대의 기교와 기술은 분명 진보했다. 하지만 음악적인 폭이나 역량도 그만큼 성숙하고 있는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경화는 "실황이든 음반이든 연주자는 바이올린을 손에 잡은 그 순간만큼은 듣는 사람의 영혼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손에 쥐고 있던 커피의 온기가 천천히 식을 즈음, 정경화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내 음악 인생의 절정은 언제쯤인지 되묻는다. 하루라도 지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가차없이 떠나야 한다"고 되뇌었다. 매서운 활과 번뜩이는 카리스마로 '아시아의 표범'으로 불렸던 그가 다시 포효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협연 정경화), 5월 4일 서울 예술의전당, (02)599-5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