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클래식을 갑갑하다 했나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0.01.20 23:18 | 수정 : 2010.01.20 23:34

악보 무시! 연주자세 무시!… 베를린 古음악 아카데미
동독 출신의 '반항아'들 정부 보조금 받지 않고 프리랜서 악단으로 시작
"베를린 장벽 무너지자 세계가 우릴 알아봐"

지난 2008년 독일 베를린. 예전에 상수도 공급원으로 쓰이던 낡은 펌프장을 개축한 공연장의 무대에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AKAMUS)'가 올랐다. 연주곡목은 비발디의 《사계(四季)》였다.

연주자들은 주어진 악보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고 새로운 실험을 감행했다. 〈가을〉을 연주하면서 무용수가 연주자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떨어지면 추수라도 하듯 모아가는가 하면, 단원들도 무대 위에서 걸어 다니거나 누워가며 연주했다.

이 실내악단의 악장을 맡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자일러(Midori Seiler)는 전화 인터뷰에서 "무대 위로 올라와 그저 활을 켜고 다시 무대를 떠나는 음악회는 때때로 지루하다. 음악과 시각적 효과가 만나면 새로운 의미와 상상력을 빚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첫 내한공연을 갖는 옛 동독 출신의 고음악 단체‘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 LG아트센터 제공

다음 달 첫 내한공연을 갖는 이들은 출발부터 '반항아'였다.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절도 있고 웅장하게 연주하는 걸 사회주의적 모범으로 간주하던 1980년대 동독의 동베를린에서 이들은 음악적 탈주를 꿈꿨다. 1982년 뜻이 맞는 음악인들이 모여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 자치적인 실내악단을 만든 것이다. 자일러는 "당시 동독 음악인들은 모두 교향악단이 아니면 공식 실내악단의 단원이었다. 누구도 프리랜서(freelancer)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는 달랐다"고 말했다.

창단 초기부터 작품 선택과 협연자 선정까지 모든 걸 민주적으로 운영했던 이들이 찾은 탈출구는 바로크 시대의 작품을 작곡 당시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해석하는 고(古)음악이었다. "처음엔 작곡 당시의 옛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수 있는 악기 제작자도 없었고, 서적도 구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우리를 가르쳐줄 스승도 만날 수 없었죠."

온갖 난관 속에서 동독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위해 찾아온 서방 연주자들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명문 인스브루크 음악제 초청장을 손에 쥔 이들은 무사히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동독 화폐는 서방에서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원들은 서방 지인(知人)들의 숙소에 얹혀 지내면서 고음악을 배웠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들 앞에 놓여 있던 족쇄도 사라졌다.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는 르네 야콥스(Jacobs)를 비롯한 서방 지휘자들과 잇달아 협연했고, 명성도 높아갔다. 1982년 창단 당시 한해 20회에 불과하던 공연 횟수는 100회까지 늘었다. 자일러는 "지금은 오히려 휴식이 필요할 정도"라며 웃었다.

이들은 첫 내한무대에서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칸타타 BWV 51번(소프라노 서예리) 등을 들려준다.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내한공연, 2월 17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 (02)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