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1.07 05:45

이날 연주곡은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크스키(Mussorgsky)의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이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1873년 먼저 타계하자 추모 전시회가 열리고, 무소르크스키는 이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들을 둘러보는 행위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곡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림과 그림 사이를 걸어가듯이, '산책'이라는 뜻의 〈프롬나드(Promenade)〉가 곡과 곡 사이를 이어주지요.
이 공연에서 안스네스가 마지막 곡인 〈키예프의 대문〉을 장엄하게 연주할 즈음, 무대 뒤편에 설치된 화면에서는 피아노가 서서히 물에 가라앉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연주가 끝날 즈음 검은 피아노와 흰 물결이 시각적 대조를 이루면서 물에 완전히 잠겼습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화면으로는 피아노를 수장시키는 영상이 맞물리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이날의 실험은 안스네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상 아티스트인 로빈 로드를 초청해서 벌인 퍼포먼스(performance)였습니다. 《전람회의 그림》을 들으면서 로빈 로드가 떠올린 영상 이미지들을 화면으로 투사한다는 계획이었지요. 2년여간의 준비 끝에 공연된 이 실황은 최근 영상(DVD)과 음반(CD)으로 소개됐습니다.
두 연주자는 북유럽과 아프리카 남단이라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문화적 배경 역시 판이하게 다릅니다. 안스네스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때 로드는 거리에서 힙합을 듣고, 안스네스가 청각에 호소할 때 로드는 시각 이미지들을 활용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원작 자체가 동료 화가의 그림에서 받았던 인상을 악보로 옮기는 작업이었기에, 서로 다른 장르를 미묘하게 넘나드는 예술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관현악의 귀재 라벨(Ravel)은 1922년 오케스트라를 위해 이 곡을 편곡했고, 1971년에는 영국의 록 그룹인 에머슨 레이크 앤드 파머(Emerson, Lake & Palmer)가 록 밴드를 위한 편성으로 다시 연주했지요. 회화에서 음악으로 탈바꿈한 작품이 21세기 들어서는 다시 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긴 셈입니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연주자의 해석은 악보 위의 음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와 시청각의 시대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을 둘러싼 환경도 나날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안스네스와 로빈 로드는 지극히 이질적인 예술들을 결합시키면서, 오늘날의 해석은 때때로 악보 밖으로 과감하게 뛰쳐나와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