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내년 탄생 200주년 작곡가 슈만

  • 김성현 기자 (블로그)danpa.chosun.com

입력 : 2009.12.30 03:31

눈부시게 밝은 음악… 왜 눈물이 날까

로베르트 슈만(오른쪽)과 클라라 부부.

내년에 탄생 200주년을 맞는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은 꿈을 못다 이룬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청년 시절 "내 삶은 시와 산문, 즉 음악과 법의 투쟁이었다"고 토로했던 법학도 슈만은 당대의 빼어난 피아노 교육자였던 프리드리히 비크(Wieck)를 사사했지만 그만 오른손을 다치고 맙니다.

전업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슈만이 대신 매진한 분야가 작곡과 비평입니다. 그는 24세에 '신(新)음악 평론'을 창간하고 매서운 필봉을 휘둘렀던 당대의 비평가이기도 했지요. 무명(無名)에 가까웠던 슈베르트의 가치를 누구보다 일찍 알아보고 브람스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로 인정했던 것도 슈만입니다.

슈베르트와 브람스가 공히 베토벤의 숭배자를 자처했던 점에서 드러나듯 평론가로서 슈만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단절보다는 계승에 무게를 실었던 '온건한 낭만주의자'입니다. 리스트와 바그너로 이어지는 '급진적 낭만주의자'들과는 갈등의 싹을 내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슈만에게 '인생의 반려자'인 동시에 '음악적 분신'이었던 여인이 클라라 슈만(1819~1896)입니다. 스승 비크의 딸이었던 클라라와 슈만은 사랑을 싹 틔웠지만 비크의 극렬한 반대로 법정 투쟁까지 가는 험난한 과정을 밟았습니다. 비크 자신이 애지중지 딸을 키우면서 당대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기르려 했기에 아마도 부정(父情)이 사제(師弟)간 정리에 앞섰겠지요.

하지만 슈만과 클라라는 1840년 결혼했고 그해 슈만은 140여편의 가곡을 쏟아내며 작곡가로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슈만의 왕성한 창작 의욕 덕분에 1840년은 '가곡의 해', 1841년은 '교향곡의 해', 1842년은 '실내악의 해'로 각각 불립니다.

슈만이 오늘날 낭만주의 협주곡의 전형으로 인정받는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해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숱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분명 클라라 덕분입니다. 결혼 이듬해 슈만이 환상곡을 작곡하자 아내 클라라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늘리라고 권유했고 5년 뒤 클라라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세상에 빛을 보았지요.

하지만 슈만 부부에게 빛은 눈 부셨지만 짧았고, 그늘은 짙고도 길었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시달렸던 슈만은 1854년 라인강에 투신했고 2년여 입원 끝에 46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합니다.

어두운 구석 한 점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연하게 빛나는 슈만의 교향곡 3번 '라인'이 끝났을 때 문득 아련한 슬픔이 밀려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내년 슈만 탄생 200주년을 맞아 부천 필하모닉과 서울시향 등 오케스트라와 금호아트홀 등 공연장에선 작곡가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합니다. 한때는 고단했던 그의 육신을 집어삼켰지만 지금도 유유하게 흘러가는 라인강처럼 슈만의 교향곡은 눈부실 만큼 밝기에 도리어 슬픈 곡입니다.

▶서울시향 슈만 교향곡 2번, 1월 15일 예술의전당, (02)3700-6300

▶부천 필하모닉 슈만·브람스 페스티벌, 1월 29일부터 부천시민회관, (032)625-8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