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오늘 넘어져도 내일은 스타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12.17 03:15

부상 투혼과 전화위복
메조소프라노 디도나토 공연 중 미끄러져 다리 다쳐
휠체어 타고 '부상 투혼'단숨에 세계적 성악가로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EMI 제공

우아한 음악회 도중에도 격렬한 스포츠 경기처럼 '부상 투혼(鬪魂)'이 필요한 때가 간혹 있습니다. 지난 7월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로시니(Rossini)의 희가극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여주인공 로지나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Joyce DiDonato)는 아리아 〈방금 들린 그 목소리(Una voce poco fa)〉를 부르던 도중, 무대에서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다리를 다쳤습니다. 종아리뼈 골절로 절뚝거리면서도 1막을 무사히 마쳤고, 막간 휴식을 이용해서 응급조치를 받았답니다. 3시간여에 이르는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갈채가 쏟아졌습니다.

디도나토의 투혼은 그날 공연을 마치고 치료를 받은 뒤부터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이후 5회 공연을 모두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한 것입니다. 부상을 감추기 위해 무대 설정에 맞춰 핑크색 스타킹을 신었다고 하는군요. 디도나토는 공연 직후 홈페이지를 통해 "보통 극장에서는 '힘내라(Break a leg)'고 하는데, 나는 실제로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다친 뒤에도 3시간 가까이 연기했다고 하니 의료진도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녀는 또 "로지나가 발목 부상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라고 재치 있게 반문했지요.

이 성악가의 부상 투혼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오페라는 런던에서 절찬리에 공연되고, 이 소식이 세계로 전파되면서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로 급부상한 것입니다. 올해 마흔의 디도나토는 음악교사를 꿈꾸다가, 대학 졸업과 더불어 오페라 극장으로 뛰어들어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온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의 가수입니다.

지난달 디도나토는 명문 음반사 버진 클래식스를 통해 성악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 실린 11곡의 작곡가 역시 로시니입니다. 음반에는 로시니가 19세기 초반 유럽 정상의 성악가로 꼽혔던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을 위해 작곡했던 오페라 아리아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로시니와 콜브란은 1822년 결혼했지만, 1837년 헤어지고 맙니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로시니의 유쾌한 희가극은 정작 작곡가 자신의 삶에는 통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음반에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아리아가 실려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의 노래가 그것과 꼭 닮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자기 복제의 달인이었던 로시니는 예전에 썼던 서곡과 아리아들을 노골적으로 우려먹곤 했지요. 이 노래 역시 제목처럼 '방금 들린 그 목소리'인 셈입니다.

소프라노 못지않은 청명한 고음으로 맑고 깨끗하면서도 탄력 있게 로시니의 노래를 소화하는 디도나토의 음반을 듣고 있으면, 삶이든 음악이든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