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의 지형이 바뀐다] [中] 젊어진 컬렉터들, 미술계 '물'을 바꾸다

  • 손정미 기자

입력 : 2009.12.22 03:07

소비자가 핵심 파워로…
국내외 경매서 '젊은작가' 작품 선호 "장기적 안목보다 당장 '필' 오면 구입"
잘 팔리는 작가 중심으로 세대 교체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아트옥션쇼.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한 '커팅엣지 경매'에서 최고가는 1250만원에 낙찰된 김남표의 〈인스턴트 풍경〉이었다. 김남표의 〈인스턴트 풍경〉 시리즈는 지난 10월 열린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도 추정가보다 2배 높은 3020만원에 팔렸다. 경기 불황으로 서울 아트옥션쇼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의 지갑이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이날 낙찰되거나 경합을 보인 작품은 국내외 경매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국내 경매 시장이 홍콩 경매와 같은 해외 시장과 맞물려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미술시장이 이처럼 국내와 해외 시장이 연동되면서 작가들의 세대교체도 빨라지고 있다. 가나아트의 이정권 과장은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젊은 작가'라고 하면 보통 20대 후반까지를 말하는 것이 추세"라며 "이 때문에 국내 화랑들이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눈을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화랑은 젊은 작가를 1년이라도 잡아두기 위해 미술상을 만들어 시상하고 있다.

지난달 열렸던 홍콩 크리스티의 아시아 현대미술 경매에는 한국·중국·일본·인도 등 4개국의 작품이 출품됐다./홍콩 크리스티 제공
또 한국 작가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먼저 반응을 얻은 다음 국내에서 인지도를 높이는 경우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한국 작품을 소장하는 컬렉터가 아시아 지역으로 넓어지고 있는 것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아이디어가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중국 작가들에 비해 작품 가격에 거품이 끼지 않고 안정적이라는 점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독립 큐레이터인 윤상진씨는 "이제는 우리 작가들도 세계 시장을 상대해야 한다"면서 "젊은 작가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앞으로 더 적극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화랑들이 세계 시장을 겨냥할 때도 아시아 지역 경매에서 낙찰 기록이 있는 작가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 젊은 작가가 갈수록 강세일 것이란 전망이다. 중견·원로 작가들은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만, 해외 경매에서 낙찰되거나 국제비엔날레 등에 참여한 커리어가 부족해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젊은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이상남 작가는 "이제는 연륜이나 경험을 앞세우는 수직적 사고보다 중견작가들도 젊은 세대와 같다는 수평적 사고를 해야 한다"면서 "작품이 잘 팔려 그만큼 관심이 많아지면 미술계로선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648만 홍콩달러 에 낙찰된 홍경택의 작품〈연필>. 2004년부터 시작된 홍콩 크리스티의 한국 컨템퍼러 리 미술 경매에서 낙찰 최고가를 기록했다. 아시아 컬 렉터들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국내 미술계가 큰 변화를 맞고 있다./홍콩 크리스티 제공
국내 컬렉터 층이 젊어지고 다양해지는 점도 국내 미술계의 변화를 낳는 원인이다.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는 "컬렉터들이 과거에는 화랑에 많이 의존했지만 지금은 인터넷과 각종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스스로 정보를 찾아 나서는 젊은 컬렉터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한 점 이상씩 작품을 수집하고 있는 문형주(치과의사)씨는 "작품을 고를 때 화랑 대표보다 직접 작가를 찾아가거나 아트 컨설턴트의 조언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컬렉터들이 젊어지고 다양해지면서 인기 작가와 작품 성향도 바뀌고 있다. LVS갤러리의 이원주 대표는 "전에는 몇십 년 뒤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작품을 구입했지만 요즘 컬렉터들은 즉각적으로 필(feel)이 오면 산다"면서 "뉴욕을 돌아다녀 봐도 1000만원 이하의 미술 작품이 인기"라고 말했다.

국내 미술계가 이처럼 시장 중심으로 흐르면서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작가가 작품 팔리는 것에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작품세계가 성숙되지 못한다"며 "작가로서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은 "작가에게 경매는 당근이 될 수도 있지만 독(毒)이 될 수도 있다"며 "작가는 경매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화랑 전시를 통해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