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가을 소나타

  • 박돈규 기자

입력 : 2009.12.17 03:15

차갑고 섹시한 손숙·뜨겁게 타오르는 추상미
母女의 묵은 상처와 고통, 연극으로 폭발한다
손가락 움직임까지 보이는 두 배우 세밀한 연기 빛나

손숙·추상미 주연의 연극 《가을 소나타》(연출 박혜선)에는 뇌관이 있다. 유명 피아니스트로서 집을 떠났던 엄마 샬롯(손숙)이 7년 만에 딸 에바(추상미)에게 돌아오는 설정부터 그렇다. '바깥 열기 때문에 뜨거운 벽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을 관객도 받는다. 샬롯이 자기 말만 하다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이 폭발의 드라마도 점화되는 것 같았다. 발작 장애를 가진 샬롯의 둘째딸 엘레나(이태린)는 옆방에서 경련을 일으킨다.

잉마르 베르히만의 영화를 무대로 옮긴 《가을 소나타》는 '웰메이드(well-made)'의 모델이었다. 높이·각도·깊이가 좋은 조명(최형오), 세련된 무대(하성옥)와 의상(박항치)이 모녀(母女)의 심리적 공간을 비췄다. 피아노 건반 몇 개만으로 긴장의 리듬을 만들며 장면을 전환시킨 음악(김철환)도 인상적이었다.

손숙의 차갑고 섹시한 연기도 좋았지만 《가을 소나타》는 '추상미의 연극'이었다. 배우는 눈빛, 표정, 침묵, 몸놀림으로 관객을 잡아당겼다. 샬롯이 "에바, 내 딸아" 할 때 에바의 손가락 움직임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추상미는 디테일(세부 묘사)에 강했다. 갈망하는 게 없거나 더는 놀랄 일이 없는 여자 같다가도 뜨겁게 자신을 연소시켰다.

《가을 소나타》에서 딸(추상미·왼쪽)과 엄마(손숙)가 충돌할 때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드러난다./신시컴퍼니 제공

이 연극의 엄마는 도피하고 싶어한다. 45년간 피아노곡과 씨름한 그에겐 딸들보다 음악과 자신의 삶이 더 중요했다. 에바는 자랄 때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에바가 "난 엄마가 조종하는 못생긴 꼭두각시 인형이었어요!"라고 소리치는 순간이 이 연극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일부에 남아 있는 번역투 대사가 귀에 거슬렸다. 가족의 상처를 물리적으로 보여준 이태린의 연기 등 배우 앙상블은 좋았다. 《억울한 여자》《주머니 속의 돌》의 박혜선은 중극장 무대를 견뎌내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드라마 속에 빠져든 관객은 "엄마의 불면증은 자기 조절 기능이야" "나이 든 여자가 이제 콧등에 안경까지 얹었어" "이런 색골을 봤나" 같은 대사에서 웃음으로 반응했다. 화요일 오후 2시 공연에도 객석은 만석이었고, 40~50대 여성 관객이 절대 다수였다. 진지한 순간에 울려대는 휴대전화 벨소리와 진동음이 이 연극의 가장 큰 훼방꾼이었다.

▶1월 1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