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09.12.17 03:15

정명훈·연광철… 두 거장의 가슴 설레는 무대
피아노와 목소리로 빚어내는 슈베르트 연가곡
'반주자' 정명훈을 볼 흔치 않은 기회
연광철의 유학시절, 그는 '선망의 대상' 15년 뒤, 운명적인 조우… 함께 공연

단돈 700달러를 손에 쥐고 불가리아 유학 길에 올랐던 베이스 연광철은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공동 우승한 뒤 이듬해 프랑스 최고의 명문 오페라극장인 바스티유 무대에 섰다. 그가 맡았던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가운데 피에트로 역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15분 남짓한 단역에 가까웠다. 그날 공연이 끝났을 때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한 단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간 지휘자에게 장미꽃을 건네는 모습은 그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당시 음악감독을 맡았던 정명훈에게 단원들이 보내는 따뜻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정명훈은 "그랬나. 이제는 모두 잊었다"며 웃었다. 연광철은 그 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베를린 슈타츠오퍼)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유수의 오페라극장을 누비는 성악가로 성장했다.

두 거장이 슈베르트(Schubert) 앞에서 15년 만에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작곡가가 타계 1년 전에 완성한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목소리와 피아노로 함께 빚어내는 것이다. 세계 정상급 악단과 즐겨 호흡을 맞추고 있는 정명훈은 모처럼 지휘봉을 내려놓고 피아노 반주를 자청했다. 냉전 당시였던 1974년 구(舊)소련의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위에 입상하며 경력을 시작했고, 3년 전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내한 당시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가슴 설레는 무대다.

정명훈은 "순수하게 연주만 놓고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람의 목소리인 성악이며, 그다음이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기악이고, 마지막 꼴찌가 아마도 지휘일 것"이라며 "어린 시절부터 누나들(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을 따라다니며 반주했기에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베이스 연광철(사진 뒤)과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정명훈이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 로 서로 호흡을 맞춘다. 이들은“미완성 교향곡부터 피아노 소나타까지 작곡가의 모 든 곡이 아름답지만, 특히 가곡에 슈베르트의 매력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베이스 연광철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네 차례가량 불렀으며, 피아니스트 정명훈에게는 첫 연주가 된다. 연광철은 "저음(低音)의 성악가가 이 노래를 부르면 훨씬 짙고 굵고 어두워진다. 때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주인공이 이승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러 등장인물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오페라와는 달리 가곡 리사이틀은 성악가가 오로지 피아노에 기대어 홀로 80여분간 노래로 감동을 전달해야 한다. 연광철은 "오페라에서는 배역의 성격이 끝까지 가지만, 연가곡에서는 가곡 한 곡마다 깃들어 있는 분위기를 일일이 살려내야 하기에 힘들고 까다롭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명훈은 "제아무리 가사가 아름다워도 음악 없이는 의미가 없다. 어쩌면 가곡에서 성악과 피아노의 적절한 균형은 90%와 10%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정명훈은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은 빼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정확한 음정이나 발음을 놓치거나 무대 위에서 어색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연광철처럼) 훌륭한 선례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가 빠져나온 방에서는 "나그네로 이곳에 와서, 나그네로 다시 떠나네"라는 《겨울 나그네》의 첫 곡 〈잘 자요〉의 첫 소절이 울려 퍼졌다.

▶연광철·정명훈의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19일 오후 8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02)518-7343